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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필진] 불편했던 영화, 300

등록 2007-03-27 11:18

(주의! 이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

중학교 2학년 세계사 시간에 배운 이야기지만,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 중에 유독 두 나라가 기억나는 까닭은, 수업시간에 자주 언급되었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만큼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원으로 꼽히고 있었고, 아테네 문화는 그리스 문화의 정수로 묘사되었다. 반면, 스파르타는 시민의 정치, 경제적 평등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보다는 어렸을 때 부터 전사로 키우는 훈련제도가 더욱 강조되었다. 그래서 내게 두 폴리스의 인상은 극단적으로 다가왔다. 아테네의 이미지는 자유롭고, 민주적이면서 발전된 문화를 가진 폴리스였다면 스파르타는 군대나 군국주의로 대변되는 공포적이고 폐쇄적인 폴리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찬란한 그리스 문화’라는 것도 결국엔 다수의 노예제에 기반한 소수의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을, 민주주의의 기원이라고 치켜세워지던 아테네의 민주정 역시 불평등한 다수의 정치 참여 배제를 전제로 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부터 이 이미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스사의 주류가 아테네를 중심으로 서술된 까닭도 그 이후에 세워진 문명과 나라들이 ‘우월한’ 그리스 문화에 흡수되거나 동화되었기 때문이며, 역사를 기록하는 권력을 점하고 있었던 이 승자들에게 아테네는 가장 그리스다운 나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사’는 그리스 문명의 세례를 받은 서양이 제국주의와 만났을 때 더욱 강화되었다. 제국주의를 뒷받침했던 서양 중심주의/오리엔탈리즘은 ‘우월한’ 서양 역사 만들기에 몰두하였고 이 과정에서 다시금 그리스 문화가 더욱 강조되었던 까닭이 아니었는지.

역사라는 것이 과거의 사실 모음집이 아니라 현실의 요구와 가치, 필요에 의해 다시 재해석된 것이기에, 시간은 흐르고 시대가 지나면 역사의 평가는 자연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걸까. 아테네와 항상 비교당하기만 했던 스파르타가 영화 〈300〉을 통해 21세기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왜 스파르타는 다시 오늘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일까.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그리스를 침략하기 위해 10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는 페르시아를 막기 위해 스파르타에서 떠난 군사는 단 300명. 비록 왕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죽음에 맞이하였지만, 덕분에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차질은 빚게 되고, 스파르타의 장렬한 희생에 고무된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로 부터 그리스를 지킬 수 있었다는 영화의 내용은 테르모필레 전투라는 실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거의 벗은 수준에, ‘완소’ 복근(?)을 가진) 스파르타의 300명의 군인들이 용감무쌍하게 적을 죽이는 장면이 대부분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 없이 넘나드는,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살인과 피로 가득찼던 전투가 곧 일상이었던 스파르타 인들에게 더 이상 전쟁과 죽음, 부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끝없는 살육 속에서 회의를 느끼지 않는다. "전쟁은 곧 선이다"는 국가의 외침에 저항하지 않는다. 내부의 필요에 의해서든 외부의 공격에 의해서든 언제든지 전쟁에 동원될 수 있고, "무자비"하게 가능한한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스파르타의 군사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군대라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사람인 것을. 레오니다스의 오랜 친구이자 300명의 군사의 장수는 아들의 죽음에 몸부림치는 평범한 아버지였고, 용맹하기 그지 없던 레오니다스 그 역시도 죽음의 순간에 아내를 부르며 눈을 감는다. 가장 용맹한 군사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인간의 감정 표현 역시도 인간의 약점으로 치부하여 아들에게도, 아내에게도 한 번도 사랑한다 말 할 수 없는 인간을 만들어낸 스파르타. 영화는 이렇게 스파르타의 훈련제도의 모순을 드러내는 듯 했지만 결국은 “100만대군과 맞서 나라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죽었던 300명의 자유로운 군사들을 기억하라”는 메세지를 던지는 것으로 끝이난다.

태어나는 그 순간 부터 생존을 향한 투쟁을 해야만 했던 스파르타의 ‘남성 자유 시민’인 군인들. 그들은 왜 그렇게 ‘빡세게’ 살아야 했던걸까?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전쟁으로 부터 자유로웠던 시기는 얼마되지 않는다. 정복전쟁으로 나라를 멸하고, 세우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강한 군사를 통한 전쟁의 승리는 한 나라의 생존과 번성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리라. 강한 군사를 낳고, 키우고, 유지하는 것이 스파르타 사회의 목적이었던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근데 꼭 여기에다가 인간성이 어쩌고, 정의가 어쩌고 하는 사족을 달아야 하는걸까. 바로 이 지점에서 그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고대 사회와 영화의 관객들이 살고 있는 현재 사회가 오버랩된다. 고대 사회에서 적의 공격에 반격하고, 국가 영토를 넓히기 위한 정복 전쟁에 인간성이 개입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자국민이라 할지라도 노예라는 이유로 그들은 인간이하로 취급했던 고대 국가인데 하물며 다른 종족/나라의 국민들에게 줄 측은지심이 있었겠는가. 자유의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고대 사회에서 ‘자유로운 군인’ ‘자유로운 국민’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영화에서 언급된 전쟁의 명분과 전쟁국가로서의 스파르타의 존재이유는 오늘날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의 명분을 꼭 닮았다. 배경만 고대일 뿐이지 그들의 전쟁 논리와 명분은 바로 오늘의 언어였던 것이다. 현대의 전쟁 논리로 고대의 전투를 치뤄낸 그들은 고대와 현대의 경계를 오가면서 고대를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오늘을 얘기하고 있다. 전쟁에 질문하지 말 것. 국가에 충성할 것.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는 개인의 감정/권리는 잠시 접어둘 것. 그들이 오늘의 전쟁을 두고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서양 중심주의로?

스파르타 이야기가 조명 되서, 기존의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구분했던 선이 허물어지는 걸까 싶었더니 결국 영화는 ‘스파르타도 그리스다’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스파르타(그리스)의 용사들은 하나같이 용맹하고 잘생겼다. 반면 적인 페르시아(동양)는 기괴한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여성스러" 왕이 지배하고, 거의 나체에 육체적 탐욕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사람들로 가득찼으며, 괴상한 옷을 입은 군인들과 괴물, 그리고 포악한 동물들로 구성된 군대를 가지고 있다. 스파르타 군인들의 용맹함에 페르시아 군인들은 겁에 질리고, 도망가기 급급하다. 스파르타로 대변되는 그리스 문화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그 반대편에 서 있는 페르시아를 낙후되고, 쾌락적이며 신비한 곳으로 묘사함으로써 영화는 은근히 오리엔탈리즘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 영화가 여전히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까닭은 전쟁이라는 상황이 주는 특수성 때문이리라. 일단 전쟁은 적군/아군의 구별이 뚜렷하기 때문에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선/악의 대립 구도가 자연스럽고 확실하게 만들어진다. 여기에 영화는 전쟁의 스펙터클한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눈을 충족시키고,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빚어지는 사랑, 인간적인 고뇌, 비극적인 상황을 그려내고 나아가 이 모든 악 조건(전쟁)을 초월하는 인간상을 그려냄으로써 관객들의 마음을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나는 전쟁이 만들어내는 잔혹한 상황을 하나의 즐김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전쟁영화가 싫다. 살상 무기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지를, 사람이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를 덤덤히 보여주고 그걸 보며 스펙터클함을 즐기게 하는 전쟁영화가 싫다. 전쟁이 만들어 낸 비극을 논하면서도, 바로 그 전제가 되는 전쟁 그 자체에 의문을 던지지 않는 전쟁영화가 싫다. 더욱이 전쟁영화는 영화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전쟁에 대한 환상은 현실의 전쟁에 대한 환상으로 까지 이어진다.

300 스파르타 군사의 장렬함에 감동하거나 혹은 그 멋진 몸매에 감탄하고 넘어갔음 그만이었을 영화를 나는 너무 불편하게 본 걸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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