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4월 12일 개봉)을 보면서 장 피에르 주네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감독 나카시마 데쓰야가 주네의 스타일을 차용했기 때문도 아니고 야마다 무네키의 가학피학적인 소설을 경쾌한 뮤지컬 코미디로 각색한 이 영화의 줄거리가 주네의 영화들과 비슷했기 때문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들을 고려한다고 해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아멜리에〉 장르의 일부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아무래 생각해도 장 피에르 주네는 〈아멜리에〉로 하나의 장르를 만들었다. 이 장르는 두 가지 특징으로 정리될 수 있다. 주인공으로 내세운 여성 배우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찬, 그를 위해 동원되는 시청각적 표현의 폭격. 물론 둘 중 어느 쪽이 더 강조될 수도 있고 하나가 은근슬쩍 무시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장르의 성격을 정의하는 데엔 별 무리가 없다. 어차피 장르가 있다면 그 벽을 깨는 시도도 있기 마련이니까. 〈마츠코〉 말고 최근 예로는? 박찬욱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역시 그 장르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홍보상 비를 전면에 내세우기는 했지만 이 영화의 진짜 목적은 결국 정말로 독특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임수정을 따라가는 것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재미있는 건 이 노골적인 러브레터의 형식이 내용의 안주로 그치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영화는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 영화를 본 분은 아시겠지만 이 영화의 내용은 여자 주인공들을 무작정 박해하는 일본 멜로드라마 공식들을 모아 메들리로 엮어놓은 것과 같다. 주인공 마츠코는 불량청소년 제자와 성희롱범 교장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 멜로드라마 장르의 주인공들이 빠질 수 있는 최악의 함정에만 골라서 빠진다. 그 때문에 〈버라이어티〉의 러셀 에드워즈는 이 영화를 일본 멜로드라마의 패러디라고 보기도 했는데,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보이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나카시마 데쓰야는 이 끔찍한 이야기를 총천연색의 뮤지컬 코미디로 만들었던 것이다. 장 피에르 주네가 〈아멜리에〉에서 했던 것과 거의 마찬가지의 여성 예찬을 쏟아 부으면서.
여성 또는 여성 이미지에 대한 예찬이 〈아멜리에〉 이전에 없었던 건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주네는 〈아멜리에〉를 통해 행동과 관점의 경계선을 깨뜨렸다. 더는 염치를 차리지 않았다고 할까.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원초적인 태도인데, 그 뻔뻔스러운 태도가 영화쟁이들에게 일종의 해방구를 제공해준 건 분명한 듯하다. 좋아하는 게 있다면 무조건 보여주라. 상상력을 감추지 마라. 자신의 얄팍함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미리 걱정하지 마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면 아직까지 그 태도는 생산성이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일본 멜로드라마는 그 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았던 그 어떤 것들보다 달라 보이니 말이다.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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