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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소리로 날아오른 사랑이여…‘천년학’

등록 2007-04-04 18:03수정 2007-04-05 00:10

<천년학>
<천년학>

고즈넉한 선학동은 너른 호수를 안고 있다. 그 호수를 학이 내려 앉은 듯한 산세가 다시 안는다. 지난 3일 언론에 공개한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은 그곳에서 시작한다. 그만큼 너른 품으로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을 포용한다. 송화와 동호의 이어질 듯 끊어질 듯한 사랑이 돋을새김돼 있지만 식민지 시절과 이념 대립, 개발 독재를 넘겨온 한국인 삶의 발자취도 여러 결로 너울거린다. <서편제>가 한에 초점을 맞췄다면 <천년학>은 허무마저 긍정하며 삶을 껴안는 사랑 영화다.

<천년학>
<천년학>

유봉(임진택)은 부모 없는 송화(오정해)와 동호(조재현)를 데려다 소리꾼과 고수로 키운다. 피는 섞이지 않았으되 남매로 엮인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가 애틋해진다. 동호가 집을 나간 뒤 둘은 기나긴 이별과 짧은 만남을 반복한다. 동호가 가는 길은 구비졌다. 창극단 말단으로 구르다 여배우 단심(오승은)과 징글징글한 정으로 살게 된다.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노동자로 일해 송화에게 줄 집 한 칸 마련하지만 불쌍하고 불쌍한 단심을 내칠 수 없다. 여기에 얽혔다 풀어지는 송화의 인생도 구슬프다. 눈 멀어 소리품 팔다 부잣집 첩으로 들어앉아 한시름 놓는가 하더니만, 늙은 남편 떠난 뒤엔 기억도 가물가물한 제주도 고향으로 어디로 떠도는 신세다. 단심은 어떤가? 곱게 분칠한 얼굴 위로 떨어지는 박수 소리 요란하지만 무대 뒤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 연기만 휘휘 뽑아내는 그의 삶도 신산하다.

임 감독은 그들의 삶에 한국의 근현대사를 스치듯 점묘해놨다. 송화가 기억하는 제주도 고향은 “총 소리가 콩 볶듯 이어지는 곳”이다. 부모는 좌익으로 몰려 억울하게 살해당했다. 송화를 첩으로 둔 노인은 친일파이지만 여전히 떵떵거리는 부자다. 개발에 밀려 선학동의 호수는 흙으로 덮히고 그 위로 아스팔트 도로가 달린다. 학들은 오지 않고 소나무는 말랐다. 적벽가를 유달리 잘했던 명창은 자식들에게도 잊혀져 기찻길 옆에 아슬아슬 버틴 슬레이트 지붕집에서 삶을 마감한다.

임권택 감독
임권택 감독
‘서편제’ 이후 송화와 동호
반복되는 긴 이별·짧은 만남
고통과 허무까지 껴앉는
거장 임권택의 ‘삶의 긍정’

그런데 <천년학>에선 슬픔은 황홀한 순간과 맞물린다. 만남은 되레 무덤덤하고 헤어짐은 찬란하다. 서로 반대로 보이는 것들이 깎지를 껴 곡진한 인생을 위로한다. 송화의 늙은 남편이 죽어가는 별당에는 벚꽃이 흐드러졌다. 봄 바람을 타고 꽃잎은 무더기로 하늘 길을 왁자지껄 오른다. 남편 곁에서 송화는 판소리 한 자락을 펼친다. “꿈에 살고, 꿈에 죽어, 가는 인생 부질없다~.” “하늘과 땅이 어떻게 저렇게 편하게 어울릴까”라고 동호가 읊조리는 곳에서 송화는 동호를 떠나보내며 <춘향전>의 한 대목을 목놓아 부른다. “갈가보다 갈가보다… 무슨 물이 막혔건데 내님은 못오시나~.”

<서편제>가 판소리를 영상으로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면 <춘향전>에서 판소리는 적극적으로 주인공의 심경을 담아낸다. 시사회 뒤 기자간담회에서 임 감독은 “내가 거쳐온 세월이 가득 담긴 영화가 되길 바랬다”며 “한을 뛰어넘어 사랑을 소리로 승화하는 이야기를 커다란 한국화에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서편제>의 마지막에서 송화는 아이의 손에 이끌려 칼바람 치는 겨울 눈길을 걷는다. 희망은 있으되 슬픔이 압도한다. 그런데 <천년학>의 소름 돋도록 아름다운 결말은 삶과 사랑의 여정을 푸근하게 응시한다. 애조는 띠되 관조적 긍정이 압도한다. 임권택 감독과 30년 동안 함께 손발을 맞춰온 단짝 정일성 촬영감독, <취화선>부터 함께 일한 김동호 조명감독은 한국화의 진경을 스크린에 옮겼다.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가 원작으로 12일 개봉한다.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키노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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