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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블로그] 재갈 물린 문혁의 진실

등록 2007-04-10 17:35

후제의 신작 다큐 ‘나는 비록 죽었지만’ 중국 당국 상영금지
중년의 여성은 벌거벗은 채 병원 바닥에 누워있다. 피가 엉긴 머리와 사후경직의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은 그가 이미 숨졌음을 말해준다.

중국 독립영화제작자 후제(胡杰, 1958~)의 다큐멘터리 ≪나는 비록 죽었지만≫(我雖死去)은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의 공개로부터 시작한다. 이 사진 속 주검의 주인공은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 완장을 찬 학생들에게 살해당한 첫 교사인 볜중윈(卞仲耘)이다.

그의 주검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사진으로 찍고, 아내가 남긴 모든 걸 40여 년 동안 보관해온 사람은 그의 남편 왕징야오(王晶堯, 85)다. 왕은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역사학자다. 이 작품은 왕이 역사학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 있다.

후제가 왕징야오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의 들머리에서 후제는 “아내의 주검을 사진으로 찍으며 당신은 커다란 정신적 외상을 입었을 걸로 보입니다”라고 묻는다. “당연하지. 목적은 분명했어. 역사에 정확한, 진실한 기록을 남기겠다는 것.” 그러나 중국인들이 ‘10년 대동란(十年浩却)’이라 부르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1966~1976)이 끝난 지 30돌을 넘긴 오늘날,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에 관해 진실한 기록을 남기는 일은 여전히 버겁다.

당시 중국에서 고위 당·정간부의 자제들이 다니던 ‘황가 학교’로 유명한 베이징사범대학 부속중학의 교감이던 볜중윈은 1940년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뒤 타이항산 지역의 항일 전투에도 참가한 ‘혁명전사’다. 그의 남편은 1940년대의 ‘급진적 민주화 운동가’였으며 ‘직업적 혁명가’가 되는 게 꿈이던 역사학도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터진 뒤 홍위병이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17년 동안 충실한 공산당원이던 볜중윈은 ‘대지주 계급의 딸’이라는 이유로 ‘자본주의로 달려가는 반동분자(走资派黑帮)’로 몰려 ‘비판투쟁(비투)’의 대상이 됐다. 다큐멘터리는 문화대혁명 당시의 이른바 ‘비판투쟁’이나 ‘대자보’라는 게 얼마나 유치하고 난폭하며 역겨운 것이었는지를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홍위병들은 볜중윈의 집까지 점거한 뒤 “집에서라고 자유롭게 행동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추악한 볜 암퇘지!” 따위의 욕설로 가득 채운 이른바 ‘대자보’로 거실과 서재와 방 곳곳을 도배했다. 왕과 볜 부부가 소중하게 간직해온 손때가 묻은 장서들은 거칠게 마당에 내동댕이쳐진 뒤 불꽃 속에서 재로 변했다. 여기서 홍위병이란 그가 재직하던 학교의 열 몇 살짜리 여중생들이었다.

남편 왕징야오는 홍위병들이 온 집안에 써 붙였던 ‘비투’ 대자보들, 볜을 돼지로 그린 치졸한 포스터들 따위를 모두 사진으로 기록해두었다. 볜의 죽음은 한 사람의 희생이었지만, 다큐멘터리는 문화대혁명 10년이 어떤 참혹과 고통의 아수라장이었는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게끔 해준다. 베이징 제6중학의 홍위병들이 홍위병 감옥의 벽에 사람의 피로 썼다는 “붉은 테러 만세!(红色恐怖万岁)”란 구호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인간에 대한 모독의 극치를 목도하는 고통을 관객들에게 안겨준다.

볜은 마오쩌둥이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발표한 1966년 8월5일, 홍위병들에게 맞아 죽었다. 못을 박은 각목에 머리와 어깨 등을 맞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게 사인이었다.


남편은 볜이 죽던 날, 그의 가방에 차곡차곡 들어 있던, 류샤오치(劉少奇)의 ≪공산당원의 수양에 관하여≫(论共产党员的修养) 따위의 작은 책자들을 꺼내 보여준다. 혁명이 어떻게 혁명가를 배신했는지 말해주는 장면이다.

작품의 마지막에 왕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어간 아내의 마지막 충격이 얼어붙은 어떤 ‘물건’을 4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한다. 혹시 이 작품을 보게 될 분들을 위해 여기에는 적지 않겠다. 왕은 이 모든 것을 언젠가는 세워질 ‘문화대혁명 박물관’에 진열하기 위해 간직해왔다.

얼마 전 작고한 중국의 양심 바진(巴金, 1904~2005)은 1986년 6월 문혁박물관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몽매한 역사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전시하고 모아두고 기록에 남기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동료가 내게 물었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은 다 지나간 일 아닌가. 그런데 그 다큐멘터리를 왜 금지하는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의 역사는 지나갔다. 그러나 그에 관한 진실은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문혁의 적나라한 진실이 공개될 경우 중국공산당의 도덕성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문혁의 진실이 모두 공개된다면 천안문 정면의 마오쩌둥 사진은 자리보전이 힘들지도 모른다.

중국공산당은 소련공산당이 과거 스탈린 시절의 공포정치를 너무 적나라하게 파헤쳐, 결국 인민의 공산당에 대한 혐오를 부추겼다고 평가한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비록 문혁을 ‘역사적 오류’라고 평가하고는 있지만, 그 때 저질러졌던 ‘잔혹사’를 그대로 공개하는 데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래서 중국 대륙의 인터넷에서는 문혁 때 ‘비판투쟁’ 따위의 잔혹한 장면을 담은 사진은 찾아볼 수 없다. 검열 당국이 철저하게 삭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 왕징야오의 ‘기록’에 대한 헌정이기도 한 이 작품은 오는 2007년 6월12일 중국 윈난성 쿤밍에서 열릴 예정이던 ‘윈즈난(雲之南) 다큐멘터리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랐다. ‘구름의 남쪽(雲之南)’이란 서정적인 이름을 가진 이 영화제는 네덜란드 둔(DOEN)기금, 얀 프레이만(Jan Vrijman)기금 등의 도움으로 해를 건너 열려왔으며, 올해로 세 번째를 맞는다. 그러나 후제의 이 다큐멘터리는 물론, 영화제까지 봉쇄당할 처지에 놓였다. 중국 당국이 후제의 작품을 상영 금지하면서 영화제까지 막았기 때문이다. 40여년 동안 고통스러운 진실을 간직해온 왕징야오의 기록은 아직도 고통의 긴 터널을 다 지나오지 못한 듯하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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