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300〉. 한겨레 블로그 씨네김.
요즘 영화 〈300〉에 대한 논란이 많다. 자신이 최근에 본 최고의 영화라고 극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눈뜨고 볼 수 없는 역겨운 영화라고 독설을 퍼붓는 이도 있다. 호불호가 명확히 갈린다는 말인데 이런 논란 덕인지 〈300〉은 몇 주채 승승장구를 계속하고 있다. 아직은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치는 300명의 근육들에 대적할 영화가 개봉되지 않고 있어서 〈300〉의 승리는 당분간 지속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이 영화의 어떤 점이 논란이 되고 있는지 〈300〉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관객의 입장에서 검토 해보려 한다. 객관적인 비평은 아니다. 다만 〈300〉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술자리에서 나눌 얘기를 가상으로 재구성 해보는 방식으로 이 영화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글로 남기고자 함이다.
먼저 〈300〉이 좋아 죽겠다는 이의 의견을 들어보자.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성별은 밝히지 않는다. 〈300〉이 자신이 최근에 본 영화 중 최고라며, 그것이 바로 전쟁영화의 진수라고 기염을 토하는 회사원 R을 만난 곳은 생등심으로 유명한 서울의 고깃집이었다. R은 자유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린 300명의 전사들이 생각났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영화의 감동을 전했다. 그리고 시큰둥한 내 반응에 적잖이 실망하며 나를 감화시키기 위해 열을 올렸다. 그가 너무나도 감동 받은 것은 강력한 비주얼과 압도적인 화면, 그리고 단순한 스토리인듯 했다. 그는 조각같은 근육이 움직이고 살과 피가 튀는 역동적인 화면에 쾌락을 느끼는 표정이었고 나 역시 그 점에는 어느 정도 동의 할 수 있었다. 〈300〉은 300명이나 되는 근육질들이 멋지게 죽어가는 비장한 장면을 최대한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과 최고의 기술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술값을 낼 R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내가 이 점을 언급하자 그는 역시 좋은 영화는 보편적인 호소력이 있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덜 익은 등심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나 역시 소고기는 살짝 익혀야 제 맛이라는 생각이어서 영화 얘기는 대충 마무리하고 안주에 집중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이 300명이 스파르타인이 아니고, 상대가 페르시아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이 영화를 헐리웃에서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시각적 호사만으로 영화의 다른 단점들을 충분히 덮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외계인의 침공을 막기 위한 300명의 지구용사를 그리는 홍콩영화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마침 〈300〉에 나오는 페르시아군의 기괴한 모습은 외계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뒤늦게 도착한 대학원생 C때문에 〈300〉에 대한 얘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못 볼것을 보고 온 표정으로 〈300〉의 역사적 무지와 무도한 세계관을 눈치 없이 질타했고 술값을 낼 R의 얼굴은 상기되기 시작했다. 나는 육즙을 보호하기 위해 고기를 한번만 뒤집어 굽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어서 냉랭해진 분위기를 빨리 파악하지 못했고 C는 급기야 헐리웃의 편향된 세계관과 오리엔탈리즘을 들먹이며 〈300〉을 좋아하는 관객들의 의식까지 비난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저열한 의식의 소유자로 낙인 찍힌 R은 자신은 즐겁자고 영화를 보는데 굳이 영화에도 정치와 역사의 정당성을 대입하려는 식자들의 피곤한 감상법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리고 우리는 아까 영화의 우수한 비주얼에 합의하지 않았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C는 영화의 재미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고 다수의 대중이 즐기는 영화이기 때문에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며 반론을 제기했고, 역시나 너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다 익은 고기를 각자의 접시에 옮겨주며 고기나 먹어라는 표정으로 둘을 쳐다봐 주었다. 하지만 결국 중재는 내 몫이었다. 우선 나는 계산을 할 R을 위해 영화는 프랭크 밀러의 만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따라서 내용상의 문제는 영화보다는 원작자에게 따져야 하지 않냐고 말했고, 관객들이 영화의 장점과 단점을 골라 볼 수 있을텐데 장점까지 무시하는 것은 현명한 관람이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R은 만족한 표정으로 제 몫의 고기를 입에 넣었고 스파르타 전사처럼 호기롭게 소주를 비우며 추가주문을 했다. 그러나 C는 실망감과 배신감이 얽힌 시선을 내게 보냈다. 할 수 없이 나는 300명이 싸우겠다며 투구는 썼는데 갑옷도 없이 팬티와 망토차림으로 전쟁터에 나간 모습은 솔직히 웃겼다며 C의 기분을 맞춰 주었다. 이 점에는 모두들 동의하며 웃고 넘어 갈 수 있었고 나는 나의 중재와 언변에 만족했다.
프롭(Propp)은 일찍이 러시아 민담을 분석하여 모든 민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일정한 유형을 가지고 있으며 이 인물들의 행위는 기능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이를 바탕으로 31개의 단계로 구성되는 서사구조를 밝혔으며 이 프롭의 31단계 서사구조는 오늘날에도 영화 등의 대중매체의 내러티브를 분석하는 유용한 틀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영화 〈300〉은 이 내러티브 구조에 대부분 일치하는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대중이 쉽게 공감할 단순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곳은 3차째 들어간 간이횟집이었고 R과 C의 취한 눈에는 이제는 지겹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난 술이 들어가면 아는 척 하는 것이 장기다. 나는 〈300〉을 강력한 비주얼과 단순한 이야기 구조, 편향된 세계관으로 요약했고 이 각 요소는 서로를 덮을 수 없는 〈300〉의 특징이라고 역설했다. 따라서 비주얼이 좋다고 잘못된 세계관을 덮을 수 없고,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고 영화적인 장점을 무시할 수도 없으며 단순한 이야기 구조가 좋거나 싫어도 역시 다른 요소들에 우선할 수 없다고 풀어 설명했다. 결국 〈300〉은 강력한 비주얼과 무도한 세계관이 양립하는 단순한 구조의 영화라는 것이 내 주장이었고, 이런 요소들에 호불호를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취향에 달렸다는 것이 내 결론 이었다. 그럼에도 영화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며 비판적 수용이 중요하다는 잘난 척을 마지막으로 덧 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루해진 R과 C는 이제야 해답을 얻은 표정을 가장했고 나는 은혜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봤다. 우리의 술자리는 그렇게 새벽을 향해 달렸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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