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마니 닉슨이라는 성악가를 아시는지? <왕과 나>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같은 영화에서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을 대신에 노래를 더빙한 것으로 유명한 소프라노이다. 한 달쯤 전에 이 사람에 관련된 기사가 <뉴욕 타임스>에 실렸는데, 거기서 닉슨은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서 마릴린 먼로가 부른 유명한 노래 <다이아몬즈 아 어 걸스 베스트 프렌드(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 중 “디스 록스 돈 루스 데어 셰이프(These rocks don't lose their shape)” 파트만 자기가 더빙을 했다고 밝혔다. 궁금해져서 유튜브를 뒤져 그 노래가 나오는 클립을 확인해 봤다. 마니 닉슨이 부른 부분이 구별이 되었을까? 물론 그랬을 리가 없다. 그 노래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마릴린 먼로의 노래처럼 들렸고 사실 그게 당연했다. 그 연결 부위가 눈에 띄었으면 지금까지 안 알려졌을 리가 없을 테니.
마니 닉슨의 이 고백이 조금 섬뜩하게 들리는 건, 이 이야기가 스타의 개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닉슨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내털리 우드의 노래를 부르는 건 상관없다. 웬만큼 숙련된 관객들이라면 닉슨의 목소리를 알고 있고 내털리 우드가 앞에서 그냥 입만 뻐끔거리고 있다는 걸 안다. 그 영화에서 배우인 우드와 성악가 마니 닉슨은 별개의 예술가로서 공존한다. 하지만 위에서 예를 든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서 그 개성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닉슨은 마치 고장 난 부품을 대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릴린 먼로의 몸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영화라는 장르가 그래서 재미있다. 우리는 마치 할리우드의 스타들을 신처럼 숭상하고 떠받들지만, 그들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재료에 불과하다. 그것도 온전한 재료는 아니다. 사람들은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액션 영화를 보고 흥분했지만, 그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장 스턴트 대역을 많이 쓰는 배우였다. 심지어 가냘픈 케이트 베킨세일도 슈워제네거보다 훨씬 많은 액션 장면을 직접 했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이 열광한 슈워제네거는 도대체 뭔가? 컴퓨터 시대가 되자 이런 것들은 단순한 스턴트의 영역을 넘어섰다. 캐서린 제타-존스는 <트래픽>에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로 올랐는데, 그 배우가 보여준 가장 인상적인 연기 중 하나는 컴퓨터로 조작된 것이었다. 눈이 너무 메마르다고 판단한 감독이 지타-존스의 눈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눈물을 덧붙인 것이다. 그럼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 중 어디까지가 배우의 몫인가? 아마 세월이 조금 더 지나면 패리스 힐튼도 주디 덴치처럼 보일 수 있게 컴퓨터로 연기를 조작하는 기술도 나올 것이다.
그래서? 사실 달라지는 건 없다. 아무리 매스컴에서 할리우드의 스타들을 숭상해도 영화 속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만들어지는 즉시 원본인 배우들을 지배하고 배우들이 죽고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아 우리를 유혹하고 후손들을 만든다. 배우들이 그 이미지를 팔기 위해 존재하는 마케팅 재료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이다.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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