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학>
거장이라는 평을 듣는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작품이라서 <천년학>은 더욱 화제가 되었다. 씨네21의 경우는 잡지 창간이래 최대의 지면을 할애하여 그의 작품세계와 <천년학>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단의 최고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천년학>이 흥행에서는 별로인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예술영화는 그런 것일까? 원래 예술영화는 당연히 대중의 감상과는 유리되어 있는가?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임권택 감독은 대단한 흥행감독이기도 했다. 8,90년대의 그의 작품들이 상당한 흥행성공을 거뒀고, 문민정부 시절의 <서편제>나 국민의 정부 시절 제작한 <춘향전>도 예술성 못지않게 흥행이 상당히 되었다. 그런데, 이번 <천년학>은 제작과정의 우여곡절은 둘쟤로 하더라도 흥행이 부진한 것 같다. 예의주목하는 그 우월한 영상에도 불구하고 흥행은 부진한 것이다. 이제 거장도 말에서 내려야 하는 때가 온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대로 그의 101번째 작품을 기다려야 하는가?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천년학>의 작품성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일색이다. 그리고, 인터넷 블로그를 둘러봐도 <천년학>의 영상과 음악, 엄밀하게 말하면, 정일성의 촬영과 양방언의 음악에 대해서 좋은 평가뿐이다. 배우 조재현과 오정해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장의 걸작에 대해서 딴죽을 걸고자 하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천년학>의 시간은 1956년에서 시작한다. 대략, 전작인 <서편제>가 끝난 시점에서 시작해서 최근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면서, 그 공간적 배경은 한반도의 남쪽전역을 커버한다. 제주에까지 이르는 한반도의 절경이 다 잡혀있는 것은 <천년학>의 미덕이다.
그런데, <천년학>에서 역사는 실종되어 있는 것 같다. 남한땅에서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격동을 격던 시기가 <천년학>에서는 '소리'를 평생의 업으로 하는 '소리꾼"들의 개인적인 갈등과 대립의 시기로만 치환되어 있다. 그래서, <천년학>은 탈역사화되어 있고, 영화가 응당 가져야 할 힘이 부족하다. 기술적, 제작적 높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응당 말해야 할 것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기껏 보여지는 것은 이렇다.
영화의 중반에서,소실이 된 송화(오정해)는 백사(장민호)를 위해서 소리를 한다. 백사는 친일인사였으나 해방후에도 살아남아 온갖 호사를 누리고, 그것도 모자라 죽는 날까지도 송화의 소리(창)를 원없이 듣는 호사까지 누린다.
사실, 예술이라는 것과 행복이라는 것에 이데올로기적인 잣대를 대는 것은 경솔한 짓일 수도 있다. 그리고, 비록 친일인사일지라도 천수를 잘도 누리는 것이 또다른 기준에서 본다면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묘사들과 탈역사적 치환들이 곱게만 보이지 않는 것을 왜일까? 임권택 감독은 5공시절 <아벤고공수군단>과 같은 반공영화를 찍기도했고, 그외 정권홍보적인 이데올로기의 냄새가 나는 영화도 몇 편 찍었다. 민선정부 들어선 후로는 <서편제>로 한을 한국적 정서의 극한으로 끌어 올리면서 국민감독이 되고, 해외영화제 수상도 상당히 많이 했다. 국민의 정부 들어선 후에는 영화계를 대표하여 전라도'용비어천가'를 부르기라도 하려는지 남원을 배경으로한 일부종사신화의 원형인 <춘향전>을 영화하하기도 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한국적인 것의 신화를 영화를 통해서 높게도 쌓아올렸지만. 거기에 계급적이라던가, 국제주의적인 시각이라던가, 인류보편정서의 우월성을 노래하는 영화는 없다. 이번 <천년학>도 한국이라는 태생에 깊게 뿌리를 내리기만 했을 뿐, 예술지상과 탐미에 천작하는 '소리꾼'들의 이야기에만 몰두했을 뿐 그 이상은 없다. 그리고, 사실, 수려한 영상미와 음악은 감독 홀로에게만 그 영광을 다 돌리기 보다는 임권택 감독의 오랜 동반자인 정일성 촬영 감독과 음악 담당인 양벙언에게 돌려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술이라는 것과 행복이라는 것에 이데올로기적인 잣대를 대는 것은 경솔한 짓일 수도 있다. 그리고, 비록 친일인사일지라도 천수를 잘도 누리는 것이 또다른 기준에서 본다면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묘사들과 탈역사적 치환들이 곱게만 보이지 않는 것을 왜일까? 임권택 감독은 5공시절 <아벤고공수군단>과 같은 반공영화를 찍기도했고, 그외 정권홍보적인 이데올로기의 냄새가 나는 영화도 몇 편 찍었다. 민선정부 들어선 후로는 <서편제>로 한을 한국적 정서의 극한으로 끌어 올리면서 국민감독이 되고, 해외영화제 수상도 상당히 많이 했다. 국민의 정부 들어선 후에는 영화계를 대표하여 전라도'용비어천가'를 부르기라도 하려는지 남원을 배경으로한 일부종사신화의 원형인 <춘향전>을 영화하하기도 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한국적인 것의 신화를 영화를 통해서 높게도 쌓아올렸지만. 거기에 계급적이라던가, 국제주의적인 시각이라던가, 인류보편정서의 우월성을 노래하는 영화는 없다. 이번 <천년학>도 한국이라는 태생에 깊게 뿌리를 내리기만 했을 뿐, 예술지상과 탐미에 천작하는 '소리꾼'들의 이야기에만 몰두했을 뿐 그 이상은 없다. 그리고, 사실, 수려한 영상미와 음악은 감독 홀로에게만 그 영광을 다 돌리기 보다는 임권택 감독의 오랜 동반자인 정일성 촬영 감독과 음악 담당인 양벙언에게 돌려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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