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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블로그] 바벨, 진실이 소통되지 않는 세계

등록 2007-04-20 14:31

영화 <바벨> 포스터.
영화 <바벨> 포스터.
최근에 발생한 사상 최악의 총기참사는 며칠째 세계인들의 삶을 흔들어놓고 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새로운 정보들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그 정보들을 접할 때마다 사람들은 연속된 충격에 휩싸여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단지 영화나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사건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났으니 그저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밖에 없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가진 조승희씨가 대중을 향해 집단적으로 이런 폭력을 휘두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방송국에 보낸 영상에 나타나는 것처럼 쾌락주의에 대한 보복을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그가 남긴 ‘이스마일 엑스’(Ismail Ax)란 의미에 담긴 것처럼 죄악 세상을 향한 신의 심판을 대행하고자 함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정신과 전문의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의 심각한 편집성 정신분열증의 결과였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왜 사회를 향해 분노의 총부리를 겨누었을까? 아무리 곱씹어 봐도 그의 행위는 우리의 상식과 소통되지 않는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 그것은 결국 바벨(혼란)이자 카오스(무질서)일 뿐이다. 동일한 시대를 살았던 한 청년의 집단살인적 광기 앞에 혼란스러워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한 달 전쯤엔가 보았던 영화 “바벨”(Babel)을 떠 올렸다.

모로코의 외딴 사막에서 짐승들을 키우며 비문명적인 삶을 살아가는 한 가족이 자칼로부터 염소들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한 자루 구입하게 된다. 그 총을 들고 염소 떼들을 지키던 두 형제 유세프와 아흐메드는 먼 길에서 달려오는 버스를 조준해 사격시험을 하게 되고, 그 버스에 타고 있던 리처드(브래트 피트)의 아내 수잔(케이트 블란쳇)이 우연히 그 총에 맞아 중상을 입으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국제사회는 그것을 미국인을 노린 테러범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문제를 국제적으로 해결하려하고, 그 덕분에 여행으로부터의 귀국하지 못한 그 부부의 자녀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멕시코에 가야만하는 유모 아멜리아를 따라서 국경을 넘었다가 우여곡절 속에서 사막에서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 결국 아멜리아는 불법체류자 신분이 드러나 추방당하게 된다. 한편 모로코의 사냥 가이드에게 총을 선물로 주었던 일본인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던 청각장애 여고생 치에코(키쿠치 린코)는 엄마를 잃은 슬픔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산다. 영화는 이런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다.

바벨, 진실이 소통되지 않는 세계

이 영화를 만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분명 천재 감독이었다. 그의 감독으로서의 인식 범위는 분명 일반 감독들의 한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4개국을 넘나드는 로케 촬영에서 보여준 탁월한 선택이 그랬고, 브래트 피트와 같은 최고의 배우로부터 모로코의 무명 배우들에 이르기까지 경력 유무를 넘나드는 캐스팅으로 최고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그랬다. 물론 그가 미국적 시각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혹평도 주목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는 분명히 미국적 시각을 뛰어넘지 못했다. 아울러 개발국과 빈곤국에 대한 일반적 상식의 틀 속에서 영화를 구성하려다가 그만 경제적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자초하고 말았던 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한계를 넘어섰더라면 그는 이 영화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영화를 통해서 그런 이분법적 계층을 두고 그 가정 하에서 진실과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 “바벨”에 대한 비평은 바로 이 가정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시간 내내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진실이 소통되지 않는 상황들이다. 이 영화는 사실상 네 개의 내러티브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여진 것이다. 물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사건 안에서 연결되지만 그러한 연결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영화는 모로코의 외딴 사막에서 시작해 일본 도쿄의 도심 한 복판에서 엔딩 된다. 중간은 멕시코의 한 시골마을에서 진행되는 결혼식과 그 문화적 풍경으로 할당된다. 그 세 문화를 축으로 중간 중간에 이 영화를 하나로 연결하는 내러티브가 진행된다. 하지만 그것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내용이 아니다. 영화는 결국 이 네 개의 독립된 내러티브들 속에서 진실이 소통되지 않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들춰내고 그것들이 결국은 해소되어야 하는 절대적 과제임을 관객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것이 해소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바벨이 되고 만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서 바벨의 실상들을 바라보며 답답해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보다 진실이 우선한다.

미국인 관광객이 모로코의 여행지에서 총격으로 피습되자 미국은 그것을 테러범의 소행으로 국제사회에 알리고 모로코 정부를 움직여 테러범 소탕에 나서게 한다. 사실 수사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외딴 사막에 살고 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저들을 테러범으로 단정하고 학대하는 경찰들 앞에서 그 불쌍한 농부들은 진실을 얘기한다. 그러나 공권력의 혐의 앞에 진실은 소통되지 않는다. 단지 유세프가 사격 솜씨를 뽐내느라 쏜 총알이 한 미국인에게 상해를 입힘으로써 결국 그의 형 아흐메드를 죽게 만들었다. 그런 진실을 알기도 전에 그 사건을 테러라고 단정하고 테러 진압 방식으로 다가선 국제 사회의 명분은 도대체 무엇인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진실에 대한 호소에 폭력으로 답하는 사회, 그것이 바벨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언제나 권력이 진실에 앞선다. 그래서 우리는 바벨론에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냐리투 감독은 권력보다 진실이 우선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에 혼란(바벨)이 없어진다. 조승희의 광기도 결국 바벨화된 사회가 만들어낸 광기 아니었을까? 만일에 진실이 우선하고 진실이 통한다는 걸 알았다면 그가 과연 그런 행동을 했을까? 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매질당하고 수갑에 채이고, 총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은 문명사회의 야만이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권력이 진실에 앞서는 모습이 바로 야만이다. 약육강식의 문화화된 모습일 뿐이 아니겠는가?

법보다 진실이 우선한다.

아멜리아는 리처드 부부의 두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그들을 돌봐준 유모이다. 아들의 결혼식이 있던 날 돌아오기로 한 리처드 부부가 그 총격사고로 돌아오지 못하고 카사블랑카(모로코의 수도)에 있는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늦은 밤 시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검문을 당하다가 문제가 생겨 결국 멕시코의 사막에서 아이들을 실종하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불법체류자의 신분이 드러나 결국 미국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미국 국경을 넘는 검문소에서부터 아멜리아는 소통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법 앞에 아멜리아의 진실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날 때부터 그 아이들을 키웠어도 유모임을 입증하는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진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바벨의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인류는 법이 진실에 앞서는 사회를 꼴 지어왔다. 법 앞에서는 진실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나의 사무실 앞에는 서울지방검찰청과 대검찰청이 있다. 그래서 날마다 1인 시위자를 보게 되는데 그 중에는 매일 만나는 시위자도 1명 있다. 그는 15년째 그곳에서 그렇게 시위를 했다고 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는 15년째 아무런 구제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낡은 현수막 하나 들고 그렇게 서 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진실이 법보다 우선해야만 한다는 매우 소중한 관념을 되새기곤 한다.

현대의 법체계의 근간이 되는 것은 단연 로마법이다. 로마는 법으로 통하는 나라였다. 법이 중시되고, 법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로마법의 근간이 되는 것은 자연법이었다. 로마법에서는 자연법이 실정법보다 우월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법체계를 그런 숭고한 법의 정신을 잃어버렸다. 우리 사회에서 법은 언제나 진실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회가 바벨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냐리투 감독은 법 앞에서 진실이 소통되지 않는 이 사회를 바벨로 규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도덕보다 진실이 우선한다.

이 명제는 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영화는 분명 이것에 있어서의 소통 문제도 접근하고 있다. 감독의 사상적 취향 정도로 규정하고 얘기를 해 보자. 엄마의 자살 이후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청각장애 여고생 치에코는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민한다. 만일에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그녀는 분명 자신의 신체의 변화로 인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정신적 소통이 가능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자살로 그것이 막혀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모든 소통의 가능성을 단절하고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적 욕망마저도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는 소통을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치에코가 원했던 소통은 도덕적 관념이나 사회적 윤리가 금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왜 금지되어야 하는 것인지 잘 알지 못했으며, 그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자신의 내면속에 있는 진실을 드러내고 소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녀의 전라의 연기를 통해 감독은 이런 절박한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감독과 영화속에서의 치에코는 진실이 도덕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이 사회에 반향을 일으키기에는 금기의 벽이 너무 높았다. 그래서 사회는 점점 더 성적인 혼란과 문란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 세계는 바벨이 된다.

권력 앞에, 법 앞에, 사회적 관습 앞에 진실이 소통되지 못하는 우리 사회를 일컬어 바벨이라 하는 이냐리투 감독의 당찬 목소리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치열함과 소통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바벨의 세계를 방황하는 영혼들이 되고 말 것인가? 진실이 소통되는 사회를 꿈꿔야 한다. 그래야만 또 다른 조승희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무엇인가 그가 이 사회와 소통하는 것이 있었다면, 만약 그가 진실이라고 여겼던 어떤 것들이 진정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그가 살았었더라면....그랬더라면 그가 이처럼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그가 세계를 휘저어 놓은 것은 결국 바벨화되어 가고 있는 이 사회의 자업자득은 아닐까? 그와 연관된 비극을 바라보면서 이냐리투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진실이 소통되는 사회가 더욱 더 그리워진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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