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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기억은 잃어도 삶은 계속된다

등록 2007-04-30 18:04

내일의 기억
내일의 기억
내일의 기억
<내일의 기억>(감독 쓰쓰미 유키히코)에서 주인공 사에키 역을 맡은 와타나베 겐은 키가 184㎝다. 하지만 사에키는 구부정해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은 광고회사 부장이지만 “감사합니다”, “부탁드립니다”를 입에 붙이고 산다. 그의 어깨 위엔 와타나베 겐이 주로 연기해온 당당한 장군의 갑옷 대신 생활의 굳은살이 올라앉았다. 성실하게 일상을 겪어내며 사에키의 큰 몸은 다른 중년이 그렇듯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직장 생활 26년째인 49살 사에키의 뇌가 쇠잔해지기 시작했다. 알츠하이머병이다.

<내일의 기억>은 ‘이래도 안 울 테냐’라고 들이대는 최루성 멜로 영화가 아니다. 비극적인 상황으로 압도하지 않은 채 거리를 유지하며 일상을 관찰한다. ‘본래’ 쓸쓸한 삶과 ‘그래도’ 따뜻한 사랑에 대해 곱씹을 여유를 준다. 특별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결국엔 삶이 저물 모두의 이야기를 품었다.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고 그 사이에서 잡은 균형이 <내일의 기억>의 힘이다.

큰 프로젝트를 따내고 딸의 결혼도 앞둔 사에키는 억울하다. 치료법이 없다는 말에 “죽을 날만 기다리란 말이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의사는 답한다. “죽는 건 인간의 숙명이지만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 사회는 비정하더라도 사람에겐 체온이 있다. 그는 한직으로 내몰리고 그나마 딸의 결혼식 날까지만 다닐 수 있다. 그래도 상사는 “진심으로 고마웠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부하 직원들은 떠나는 그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담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건넨다. 덕분에 도쿄 마천루 아래에 선 그는 작지만 그리 초라하지 않다.

알츠하이머 걸린 49살 가장
사랑하는 아내마저 기억 저편으로
비관 않고 담담하게 끝까지 걷는다

병은 잔혹하지만 삶이 온통 잿빛인 건 아니다. 손녀가 태어나자 그는 “돋아나는 새싹”이란 뜻의 이름을 지어준다. 부인 에미코(히구치 가나코)는 “당신 곁엔 내가 있잖아”라고 등을 다독인다. “전부 먹을 것”이라고 김 가루로 밥 위에 글자를 써두기도 한다. 그는 에미코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도자기를 만들며 소일한다. 그렇다고 삶이 소꿉장난처럼 아기자기하게 흘러갈 수는 없다. 사에키가 직장에 다니게 된 아내를 의심하자 에미코는 “내가 힘들 때 당신은 어디 있었냐”고 쌓였던 울분을 쏟아낸다.

에미코는 남편과 고통을 나누려 하고 사에키는 도자기에 에미코의 이름을 새겨 기억하려 애쓰지만, 사에키만이 짊어져야 할 몫이 있다. 사에키는 중년의 에미코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에미코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기 이름을 말해 주지만 사에키는 에미코를 뒤로 한 채 녹음이 짙푸른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같이 걸어줄 수는 있지만 대신 걸어줄 수는 없는 길이다.

와타나베 겐은 기자 회견에선 “알츠하이머병이란 진단을 듣는 장면에서 내 경험 속 봉인됐던 것이 열려 저절로 토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사에키를 이해할 법하다. 1990년 대작 영화 <하늘과 땅>의 주연을 맡은 직후 백혈병 진단을 받고 촬영 중간에 하차했다. 나았나 하면 재발해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다. 200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재기해 헐리우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배트맨 비긴즈>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 등에 출연했다. <내일의 기억>의 원작 소설을 본 그는 감독을 물색해 제작에 뛰어들었다. 10일 개봉.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거원시네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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