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에게나 ‘내 인생의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감독들에게야 오죽 하겠습니까. 언젠가는 꼭 찍고 싶은 영화, 그런 ‘꿈의 영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꿈의 영화’는 아무나 찍지 못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검증받은, 그것도 계속해서 영화를 ‘망해 먹지 않는 능력’을 보여준 탁월한 감독들에게만 그 기회가 돌아갑니다. 결국 영화란 ‘남의 돈으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피터 잭슨에게 꿈의 영화는 <반지의 제왕>이었고, 세르지오 레오네에게 꿈의 영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였습니다. 피터 잭슨처럼 감독 생활을 그리 오래 하지 않은 젊은 시절에 그런 영화를 찍는다면 행복한 일이겠지만 왠만한 거장들도 꿈의 영화를 찍기란 쉽지 않습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조차 늘그막에야 그런 기회를 잡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홍콩을 대표하는 감독, 그리고 할리우드로 건너가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액션영화 감독으로 군림해온 오우삼(이하 우위썬, 吳宇森, 61)에게 그런 ‘꿈의 영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과연 어떤 영화였을까요? 5월10일, 중국 베이징 웨스틴 호텔에서 발표회를 연 우위썬의 새 영화 <적벽대전>이 바로 우위썬의 ‘언젠가 찍고 싶었던’ 영화입니다. 원래 제목은 <적벽(赤壁)>(영어명

오우삼 감독.
그러나 그의 날카로운 눈매만큼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습니다. 거의 20년을 기다렸다는 감회 때문인지 이날 우위썬은 다소 상기된 모습이었지만,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차분한 목소리로 이번 영화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첫마디는 출연진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영화를 30년 찍었지만, 이번처럼 완벽한 출연진으로 꿈을 이룬 것은 처음입니다. 한마디로 ‘꿈의 조합’(夢幻組合=드림팀)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꿈의 영화를 찍을 기회를 준 투자자들에게 감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남의 돈으로 예술하기, 정말 힘들겠고 그래서 더욱 감사하겠지요. 이어 그는 주요 출연진을 한 명 한 명 무대위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스타들이 줄지어 무대에 올랐어도 이날 발표회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위썬 감독이었습니다. 모든 질문이며 스포트라이트가 우위썬 한 사람에게 집중됐습니다. 심지어 량차오웨이(양조위)나 진청우(금성무)도 이날은 조연 중의 조연에 불과했습니다. <적벽>이란 영화가 오위썬 필생의 숙원이고, 그래서 완성되면 단순히 `directed by John Woo'가 아니라 `film by John Woo'가 되어야 할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날 등장한 배우들을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화질이 영 아니라 죄송합니다. 플래시도 못터뜨리고 앉아서 찍어 시야가 가리는 점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주유 역할을 맡은 량차오웨이(양조위)입니다. 량차오웨이는 이날 무척이나 조용하고 힘이 없는 모습이어습니다. 뒤에 다시 언급합니다만 체력이 약해 굉장히 신경쓴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영화기자들 사이에선 항상 이렇게 힘없는 모습으로 인터뷰하는 배우로 알려져있습니다.

량차오웨이(양조위)
량차오웨이의 왼쪽은 조조 역할을 맡은 중국 배우 장펑의(장풍의·43)입니다. 어느새 중년이 된(사실 그 전에도 중후하긴 했지요) 연기파 배우입니다. 영화팬들이 아닌 분들께는 낯이 많이 익지는 않은 배우입니마단 <패왕별희>에서 시투역을 했던 그 사람입니다. 다음은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 제갈량, 곧 제갈공명 역의 진청우(금성무·34)입니다.

진청우(금성무·34)
진청우는 여전히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외모를 한껏 뽐내는 듯한 모습입니다. 진청우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한번도 한국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아시아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의아한 일입니다. 자주 한국을 찾는 다른 중국권 배우들과는 전혀 다르지요. 그래서 우리 영화계에서는 ‘진청우가 한국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습니다. 그가 일본계인 것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지요. 참, 진청우의 옆에 앉은 저 배우, 생각나십니까? <적벽대전>에서는 오나라의 지도자 손권 역할을 맡는 `장천'(張震, 31)입니다. 최근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숨>에도 출연했습니다. <와호장룡>에서 호 역으로 나와 장쯔이 상대역을 했던 배웁니다. 연기파로 성장하는 중이고, 국제적 지명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린즈링(임지령, 33)
소교역을 맡은 대만의 인기모델 린즈링(임지령, 33)도 관심을 많이 모았습니다. 중국권에서 최고 인기인데, 이 영화로 배우로 데뷔합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중국을 겨냥하고 만든 영화고, 중국이 지원하지만 캐스팅은 홍콩과 대만 톱스타들로 짜여 있습니다. 처음부터 동아시아권은 물론 세계 시장을 향한 블록버스터기 때문에 글로벌 지명도가 있는 량차오웨이와 진청우를 동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배우들은 조연급에서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노래 <눈이 큰 아이>가 떠오르는 자오웨이. 손권의 여동생으로 유비에게 시집가는 손상향 역을 맡았다.
손권의 여동생 손상향역은 미녀 배우 자오웨이(조미, 31)가 맡았습니다.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마니아들을 거느린 드라마 <황제의 딸>의 그 조미입니다. 영화팬들에게는 이런 설명보다는 역시 주성치 영화 “<소림축구>에서 만두집 아가씨”라고 말하는게 빠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선 일명 ‘중국의 김희선’으로 부르지요. 자오웨이가 이 역을 맡는 다는 것을 현장에서 들으면서 저는 혼자서 괜히 웃음을 짓고 말았습니다. 손권의 여동생이라면, 유비에게 시집가서 유비 부인이 된 손부인입니다. 그런데 이 손부인은 여성임에도 당차고 무술에 능하며 시녀들을 무술 수업을 시켜 군대처럼 이끌고 다니던 개성 강한 여장부였습니다. 제가 웃음 지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삼국지 가운데 하나인 고 고우영 화백의 만화 삼국지 <고우영 삼국지>에서 이 손부인을 바로 저 자오웨이처럼 `유달리 눈이 큰 캐릭터'로 설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고우영 화백의 만화를 보았을리도 없는데 우연의 일치라는 점에서 참 신기했습니다. 고 화백은 극중에서 손부인을 '생고무 체질의 탱탱녀'로 다소 마초적으로 묘사했는데,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합니다. 비록 `꿈의 영화'를 찍게 되었지만 이 <적벽대전>을 우위썬이 준비하는 과정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우선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삼국지>라면 떠올리는 주인공 3형제인 유비-관우-장비의 비중이 낮고, 중국 최고의 영웅 캐릭터인 제갈공명도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위썬이 꼽은 주인공은 바로 오나라의 장수 주유입니다. 그리고 이 주유 역에 처음 그가 캐스팅하려고 했던 배우는 우위썬과는 <영웅본색> 등 여러 영화서 각별한 인연을 맺은 그의 페르소나 저우룬파(주윤발)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저우룬파는 이 영화에 참여하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 소문들이 돌았으나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우룬파 대신 그가 찾은 주유 역 배우는 거의 당연하겠지만 중화 최고 스타 량차오웨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량차오웨이가 이 역할을 맡은 것에도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애초 량차오웨이는 우위썬이 제갈공명 역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 역할을 고사했고, 그래서 출연하지 않을 영화였는데 저우룬파가 빠지면서 다시 그가 주유 역할을 맡아 출연하게 된 겁니다.그리고 주유 역할을 맡고서는 중간에 한차례 포기하려고 하는 등 어렵게 어렵게 기용되었습니다. 량차오웨이는 스스로 체력적 한계도 느끼고, 홍콩 사람인 자신이 중국 표준어인 베이징 지역의 `보통화' 발음이 안좋아 언어적 문제 때문에도 고민이 많아 중간에 그만두려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우위썬과 일한다는 것이 주는 배우로서의 흥분, 그리고 새로운 도전이란 점에서 결국 배역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고 이날 설명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주유에 대한 완전한 캐릭터 구상은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천하의 량차오웨이니만큼 우리들이 역시 양조위!라고 만들 것 같습니다. 다만 이날 체력을 언급했던 량차오웨이가 발표회 내내 힘이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인 점은 안타까웠습니다. 실제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것 같더군요. 여기에 한국 배우인 정우성과 일본의 와타나베 겐 등이 기용된다는 이야기가 무성했으나 결국 모두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좌우지간 캐스팅 과정에서 이런 고생을 겪어서인지 우위썬은 이날 발표회 내내 출연진을 추켜세웠습니다. 이 <적벽>은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붓는 만큼 스케일도 큽니다. 나무로 100미터가 넘은 전투선을 실제로 만들어 띄우며, 더 크게는 영화 1편과 2편을 동시에 찍습니다. 그래서 내년 여름과 겨울에 나눠서 개봉할 예정입니다. 영화에서 이렇게 처음부터 막대한 돈을 들이는 영화들이 모험에 가깝게 후속편까지 미리 찍은 경우는 3편을 한꺼번에 찍은 <반지의 제왕> 말고도 <슈퍼맨>이 있습니다. <슈퍼맨>은 1편과 2편을 미리 한꺼번에 찍었지요. 우위썬이 그리는 <삼국지>는 어떤 것일까요? 이날 우위썬은 “역사가 아니라 느낌을 그릴 것”이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우정이다, 영화의 주제는 용기와 단결이 될 것이다”이라고 말했습니다. 보통 삼국지에서 그리듯 주유와 제갈량을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경쟁하는 필생의 라이벌 관계가 아니라 걸출한 영웅끼리 이해하고 돕는 영화가 될 것을 암시했다고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출연진과 감독이 모두 일어서 인사를 하는 모습입니다.

왼쪽부터 장펑의, 량차오웨이, 우위썬, 진청우, 장천

왼쪽부터 진청우, 장천, 자오웨이 순.

"기자야, 팬이야?"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디카로 스타들을 담는 중국 기자들.
<적벽대전>은 내년 관객들을 찾아갑니다.
과연 쏟아지는 관심처럼 좋은 흥행 성적을 낼까요?
<삼국지>라면 사죽을 못쓰는 한국과 일본 관객까지 사로잡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도 한번 점쳐 보시지요. [베이징/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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