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1시간 반짜리 ‘공익광고’

등록 2007-05-24 18:10수정 2007-05-24 21:37

저공비행
얼마 전에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신작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봤는데, 영화의 지엽적인 면에 신경이 쓰여 도대체 스토리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바로 주인공들의 자전거 타는 습관이었다. 뒤에 사람을 태우고 가는 거야 로맨틱한 관습이나 우정의 표현이라고 이해한다고 해도, 이 친구들의 다음 행동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내리막길을 브레이크도 잡지 않고 전력 질주하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나, 자전거를 타고 전화를 받지 않나 …. 물론 주인공은 자전거의 브레이크도 제대로 점검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영화는 결코 이를 그대로 넘기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이런 무책임한 자전거 습관은 세 건 이상의 심각한 교통사고로 연결되는데, 그 중 둘은 심각한 인명손상까지 부른다. 주인공에게 시간여행의 능력이 있어서 이 모든 사건들이 얼렁뚱땅 수습되긴 하지만, 그래도 우선순위는 분명한 거다. 이 영화에서 정말로 중요한 건 주인공이 누구랑 데이트를 하느냐, 누구의 구애를 거절하느냐, 누구와 누구를 연결시켜주느냐의 사사로운 문제가 아니라, 영화가 끝날 무렵에 주인공이 자신의 끔찍한 자전거 습관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인식한다는 것이다. 사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정말로 그랬는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머릿속이 텅 비지 않았다면 교훈을 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전거를 그런 식으로 무신경하게 타다간 사람들이 다치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갈수록 이런 실용적인 교훈이 연애 따위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공익광고 내용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지만, 공익광고가 학원연애담보다 더 낮은 수준의 예술작품이라는 근거도 없다. 결국 메시지의 경중이 있을 뿐 예술작품인 건 모두 마찬가지이고, 여기서 중요한 건 출신성분이 아니라 그 개별 작품이 더 좋은 예술작품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연애물보다는 공익광고로 효율적이다. 영화가 들려주는 고등학생들의 연애담은 아무리 시간 여행을 섞어도 솔직히 뻔하고 지루하다. 하지만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였다면 한 번만 이야기하고 넘어가버렸을 교통사고 설정을 시간여행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계속 반복하며 그 끔찍한 사고의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는 공익광고 파트는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하며 메시지도 효율적으로 전달되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 모두가 학교 시절 사귀었던 친구들과 애인들을 회상하며 달짝지근한 감정으로 극장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전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 자전거를 한 번쯤 점검해보고 자신의 자전거 타는 습관을 곱씹어 보았을 거라고는 확신할 수 있다. 그만큼이나 메시지의 효과가 강력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 영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을지 누가 알랴. 이거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힘인 것이다.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