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포스터.
그리고 감동했다. 타인의 존재와 그 삶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 앞에서 키에르케고르가 가르쳐 주었던 신 앞에서의 ‘단독자’로 살고 싶었던 실존주의적 욕망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이웃을 지옥이라 여기고 자신의 실존에 천착(穿鑿)하면서 살고자 했던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 의식에 대항하여 이웃이 곧 삶의 의미이자 천국이라고 가르쳤던 피에르 신부의 철학을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타인들의 삶이 내게 그렇게 큰 의미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나 존경심, 나의 삶이 타자의 생명과 연결되어져 있다는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 등으로 타자 혹은 타인이 어느 정도 나의 사유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타자성에 대한 의식들은 거의 대부분 타자 및 나와 관련된 존재성의 측면에서 관념적으로만 작용하던 사유였을 뿐이었다. 타인의 삶이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 침입하도록 내 의식 전체를 열게 만든 것은 137분 동안 진지하게 전개된 <타인의 삶>(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주연: 마티나 게덱 , 울리쉬 뮤흐 , 세바스티안 코치, 2006년 독일영화)이라는 영화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공산주의 치하의 동독에서 비밀경찰이자 첩보요원으로 활동하던 비즐러(울리쉬 뮤흐)는 우익 요원으로 지목받고 있던 극작가 드레이만(세바스티안 코치)과 그의 연인이자 당시 최고의 여배우였던 크리스타(마티나 게덱)를 감시하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이 일로 인해 비즐러는 도청을 통해 이 부부의 삶을 24시간 감시하게 되면서 ‘타인의 삶’을 주목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인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을 잠시 던져볼 수도 있다. 누군가 자신들의 삶을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면 삶의 내용과 방식은 매우 달라질 것이다. 거기에는 의식적이고 인의적인 삶의 흔적들이 도처에 묻어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본질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삶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타인과 함께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타인 앞에서 우리는 매우 절제되고 교양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타인의 시야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는 그런 격식과 모양은 일정부분 존재하지 않게 되고 삶의 진정이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삶의 진정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타인의 삶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타인의 삶을 볼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인 이상,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일정한 관계가 성립되는 순간부터 타인의 삶은 그 관계의 렌즈를 통해 재구성되어 버린다. 타인의 삶의 순수성이 변질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성과 순수성을 담보할 수 없는 타인의 삶에 일정부분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의 삶에 우리의 운명을 일정부분 맡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타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실존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구축하고자 하는 실존적 이유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타인의 삶 속에도 분명 순수성과 진정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는 어떨까? 타인의 순수한 삶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비단 관음증 때문만은 아닌 어떤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타인의 순수한 삶과 나의 운명과 관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타인의 삶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비즐러는 특권 아닌 특권(?)을 누렸다. 동독 정부의 불손한 음모로 인해 드레이만 부부를 감시하게 되면서 비즐러는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자신들의 삶이 도청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레이만이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있었더라면 그들의 삶의 진정성을 상실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도청 앞에서 늘 자신들의 삶을 관리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다 그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순수하게 타인 앞에 노출되었다. 이제 비즐러는 그 부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전지전능자의 지위를 얻고 말았다. 타인의 사생활과 기호와 이데올로기와 가치관과 교우 관계 및 행동에 이르기까지 타인의 거의 대부분의 삶을 알게 되었다. 그 엄청난 의식의 확장과 더불어 비즐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부부의 삶은 종종 자신의 삶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부의 삶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부부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대조해 보게 되었고, 부부의 가치관과 자신의 가치관을 비교하게 되었고, 부부의 운명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예견해 보았다. 부부가 올바른 결정을 내릴 때 자신은 그렇게 하고 있는 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서 비즐러는 서서히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과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감독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즉 타인의 삶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 비즐러는 타인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서 그는 서독의 잡지에 동독의 문제를 폭로한 글을 실은 우익인사인 드레이만을 당국에 고발하는 대신에 그의 혐의를 덮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의 도청 기록에서 드레이만의 죄는 드러나지 않고, 나중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타자기마저 몰래 빼돌려 감춤으로써 드레이만이 체포되지 않도록 그를 돕게 된다. 그 전말을 알지 못했던 드레이만은 자신이 도청 당했다는 사실 자체도 전혀 몰랐다가 나중에 독일이 통일된 후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서둘러 문서보관실을 찾은 드레이만은 도청기록에 남겨진 자신의 삶이 실제와는 다르게 보고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도청을 담당했던 비밀경찰을 찾아 나선다. 그의 삶을 철저하게 감시하면서도 결국 그를 도와주었던 비즐러는 우편배달부라는 한직으로 쫓겨나 힘겨운 삶을 살아가지만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후회하지 않으면서 변화된 삶에 만족한 삶을 향유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즐러가 목격한 타인의 삶과 도청 기록에 남겨진 타인의 삶이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 차이를 살펴보면서 드레이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삶의 정체성을 두고 혼란을 겪었을까? 물론 영화에서 볼 때 그럴 수는 없었다. 도청 기록의 사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삶이 24시간 도청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했을까? 물론 기록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누군가가 다르게 기록해 놓음으로써 자신이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그 도청자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과는 다른 내용들을 보고 어이없어 했을까? 그렇게 하기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 다름과 차이 앞에 매우 진지해야만 했다. 그렇게 치열했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장 냉정한 평상심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과 기록이 차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 정도가 아니었을까? <타인의 삶>이 던져주는 삶의 순수성과 진정성이란 화두 앞에 우리의 삶을 놓아보자. 오늘 나의 삶은 타인이 인식하는 나의 삶과 일치하는가? 나의 삶은 타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니 역으로 생각해서, 내가 인식하는 타인의 삶은 그 타인의 삶과 일치하는가? 그 타인의 삶은 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다소 복잡해 보이는 질문 앞에서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삶이란 구체적 인식의 대상이다. 삶은 나의 존재에 종속된 주관성의 영역이기에 앞서 그 자체로 의미와 역할을 가진 객관적 대상이라는 명제가 지금 우리 앞에 던져졌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삶은 비록 나에게 속한 것일지라도 함부로 무의미하게 다룰 대상이 아니다. 나의 삶이 타인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계기가 되고, 타인의 삶도 나의 삶에 분명한 역할을 하는 객관적 대상이라면 너와 나의 삶은 이미 너와 나의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 나의 삶이 공동의 가치가 된다면 어떻게 나의 삶을 함부로 다룰 수 있겠는가? 나의 삶을 타인의 삶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타인의 삶>은 삶이 이처럼 무거운 형이상학적 화두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더욱이 타인의 삶이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타자성의 철학에 담긴 또 하나의 모티프를 인식하게 된다. 비즐러에게 있어서 타인의 삶은 그의 삶을 변화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내용이 담긴 영화 <타인의 삶>은 내게 삶의 형이상학적 화두와 타자성의 철학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좋은 영화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좋은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삶 속에도 분명 순수성과 진정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는 어떨까? 타인의 순수한 삶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비단 관음증 때문만은 아닌 어떤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타인의 순수한 삶과 나의 운명과 관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타인의 삶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비즐러는 특권 아닌 특권(?)을 누렸다. 동독 정부의 불손한 음모로 인해 드레이만 부부를 감시하게 되면서 비즐러는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자신들의 삶이 도청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레이만이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있었더라면 그들의 삶의 진정성을 상실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도청 앞에서 늘 자신들의 삶을 관리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다 그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순수하게 타인 앞에 노출되었다. 이제 비즐러는 그 부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전지전능자의 지위를 얻고 말았다. 타인의 사생활과 기호와 이데올로기와 가치관과 교우 관계 및 행동에 이르기까지 타인의 거의 대부분의 삶을 알게 되었다. 그 엄청난 의식의 확장과 더불어 비즐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부부의 삶은 종종 자신의 삶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부의 삶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부부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대조해 보게 되었고, 부부의 가치관과 자신의 가치관을 비교하게 되었고, 부부의 운명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예견해 보았다. 부부가 올바른 결정을 내릴 때 자신은 그렇게 하고 있는 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서 비즐러는 서서히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과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감독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즉 타인의 삶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 비즐러는 타인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서 그는 서독의 잡지에 동독의 문제를 폭로한 글을 실은 우익인사인 드레이만을 당국에 고발하는 대신에 그의 혐의를 덮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의 도청 기록에서 드레이만의 죄는 드러나지 않고, 나중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타자기마저 몰래 빼돌려 감춤으로써 드레이만이 체포되지 않도록 그를 돕게 된다. 그 전말을 알지 못했던 드레이만은 자신이 도청 당했다는 사실 자체도 전혀 몰랐다가 나중에 독일이 통일된 후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서둘러 문서보관실을 찾은 드레이만은 도청기록에 남겨진 자신의 삶이 실제와는 다르게 보고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도청을 담당했던 비밀경찰을 찾아 나선다. 그의 삶을 철저하게 감시하면서도 결국 그를 도와주었던 비즐러는 우편배달부라는 한직으로 쫓겨나 힘겨운 삶을 살아가지만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후회하지 않으면서 변화된 삶에 만족한 삶을 향유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즐러가 목격한 타인의 삶과 도청 기록에 남겨진 타인의 삶이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 차이를 살펴보면서 드레이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삶의 정체성을 두고 혼란을 겪었을까? 물론 영화에서 볼 때 그럴 수는 없었다. 도청 기록의 사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삶이 24시간 도청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했을까? 물론 기록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누군가가 다르게 기록해 놓음으로써 자신이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그 도청자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과는 다른 내용들을 보고 어이없어 했을까? 그렇게 하기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 다름과 차이 앞에 매우 진지해야만 했다. 그렇게 치열했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장 냉정한 평상심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과 기록이 차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 정도가 아니었을까? <타인의 삶>이 던져주는 삶의 순수성과 진정성이란 화두 앞에 우리의 삶을 놓아보자. 오늘 나의 삶은 타인이 인식하는 나의 삶과 일치하는가? 나의 삶은 타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니 역으로 생각해서, 내가 인식하는 타인의 삶은 그 타인의 삶과 일치하는가? 그 타인의 삶은 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다소 복잡해 보이는 질문 앞에서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삶이란 구체적 인식의 대상이다. 삶은 나의 존재에 종속된 주관성의 영역이기에 앞서 그 자체로 의미와 역할을 가진 객관적 대상이라는 명제가 지금 우리 앞에 던져졌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삶은 비록 나에게 속한 것일지라도 함부로 무의미하게 다룰 대상이 아니다. 나의 삶이 타인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계기가 되고, 타인의 삶도 나의 삶에 분명한 역할을 하는 객관적 대상이라면 너와 나의 삶은 이미 너와 나의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 나의 삶이 공동의 가치가 된다면 어떻게 나의 삶을 함부로 다룰 수 있겠는가? 나의 삶을 타인의 삶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타인의 삶>은 삶이 이처럼 무거운 형이상학적 화두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더욱이 타인의 삶이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타자성의 철학에 담긴 또 하나의 모티프를 인식하게 된다. 비즐러에게 있어서 타인의 삶은 그의 삶을 변화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내용이 담긴 영화 <타인의 삶>은 내게 삶의 형이상학적 화두와 타자성의 철학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좋은 영화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좋은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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