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배우 여재구씨의 죽음으로 ‘재연배우’라는 단어가 화제로 떠올랐다. ‘재연배우’란 무엇인가? 그건 〈서프라이즈〉나 〈솔로몬의 선택〉처럼 실화를 재구성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실제 인물의 대역을 연기하는 배우를 말한다. 여기엔 어떤 부정적인 의미도, 왜곡도 없다. 수요와 그를 만족시키는 공급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이런 식의 재연 프로그램이 일반적인 드라마보다 특별히 더 질이 낮은 장르라는 근거도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재연 프로그램도 얼마든지 창의적인 실험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몇 년 전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에퀴녹스〉에서 배우 한 명이 비행기 사고와 관련된 인물 모두를 한 프로그램에서 연기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배우는 결코 그 프로그램을, 잊어도 되는 그렇고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전 나는 마이클 모리어티가 대한항공기 추락을 다룬 히스토리 채널의 세미다큐멘터리에서 진지한 연기를 보여 주는 걸 봤는데, 그건 여재구씨의 연기와 근본적으로 뭐가 다른지? 결정적으로 비평가들이 걸작으로 칭찬하는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와 같은 작품들이 일반적인 재연 에피소드들과 형식적으로 다른 점이 뭔가?
그렇다 해도 재연배우라는 말은 불쾌하다. 그건 이 단어가 배우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카스트 제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이라면 좋겠지만, 이 단어를 사용하는 기사들은 처음부터 그 사람의 등급을 정해 버리고 그 다음은 잊어버린다. 더 나쁜 건 이 단어가 바로 그 카스트 제도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단역배우와 재연배우의 말뜻은 전혀 다르다. 단역배우는 언젠가 주연으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재연배우의 경우, 이름 자체가 그들의 미래를 가두어 버린다.
이런 태도는 그렇게 이상하지도 않은데, 원래부터 우린 이런 식의 명칭으로 자신과 타인을 가두어버리는 데 습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기네 영화를 사이코패스 스릴러로 광고하는 〈검은 집〉의 마케팅 담당자들은 처음부터 사이코패스라는 단어 안에 영화와 내용을 가두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사이코패스인 범죄자들을 다루고 있으니 거짓은 아니지만 사이코패스 스릴러라는 조어까지 만들어내어 이를 장르화하는 건 지나치다. 그냥 배우라고 해도 될 여재구씨를 꼭 재연배우라고 하는 것과 특별히 다르지도 않다. 몇 개월 전 불필요하게 소란스러웠던 된장녀 소동은 어떤가? 그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순간 여러분의 사고가 그 단어에 갇혀 버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지? 끊임없이 조어와 은어들이 태어나는 지금의 언어 환경 속에서 우리가 너무 쉽게 끌려 다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