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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블로그]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등록 2007-06-26 14:53수정 2007-06-28 18:11

지아 장커 감독의 <스틸 라이프(Still Life)>
지아 장커 감독의 <스틸 라이프(Still Life)>
지아 장커의 <스틸 라이프(Still Life)>
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장이모우 감독을 가장 중국적인 것을 만드는 감독으로 알고 있다. 그가 1987년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 영화제의 금곰상을 수상하자 중국 영화팬들은 물론 아시아의 영화팬들까지 나서서 동양의 쾌거를 격찬하면서 중국다운 영화를 가지고 세계에 알렸다고 자랑했었다. 그러나 그의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면서 장이모우의 작품들은 소위 오리엔털리즘의 전형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장이모우의 능력은 단지 서양인들의 시각에 비친 중국을 영상으로 보여주고자 애쓴 예술적 사기로 폄하되었다. 이러한 평가는 우리의 임권택 감독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모두가 오리엔털리즘의 희생양들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 거장들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서 새롭게 등장한 세대들은 그러한 비평을 넉넉히 극복해 주었다. 사실 장이모우 자신도 스스로의 자구적인 노력으로 그런 작위적 예술 행위를 피해보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것이 바로 <책상 서랍속의 동화>였다. 소수 민족의 한 시골마을에 부임한 임시교사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으로 중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장이모우는 이 영화로 1999년에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비로소 가장 중국적인 것으로 세계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중국의 6세대 감독들은 서구인들의 시각에 갇히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만의 젊은 창작력을 돋보이면서 중국을 담아내는 영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한 느낌이다.

사실 나는 장이모우의 작품 이후로 중국적인 영화를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주말 짬을 내서 들렀던 씨네큐브에서 지아 장커의 <스틸 라이프> 상연 정보를 접했다. 포스터를 보고 내용의 대강을 훑어본 순간 나는 중국의 영화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 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표를 사서보고 싶은 충동이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다음을 기약한 채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난 후 나는 드디어 주중의 저녁 시간을 할애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 일차적인 의미는 물론 보는 것이다. 영화 역시 다른 영상매체와 마찬가지로 시청각 매체이기 때문에 영화 역시 보고 듣는 것이겠지만 영화 관람은 보는 행위가 중심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는 것인가? 아름다운 영상을 보는 것인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이 두 가지의 요소들을 보기 위해서 일 것이다. 만일에 영화가 영상과 연기를 보는 것이라면 <스틸라이프>를 볼 이유는 없다. 물론 ‘산샤’ 풍경 아름다움과 한산밍의 내공의 연기를 보고 싶어서 영화를 본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만으로 두 시간 분량의 영화 전체를 보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영화 관람 행위의 목적을 또 다른 어떤 것이 두지 않는 이상 <스틸라이프>는 그저 두 시간 동안 정물화(still life는 ‘정물, 정물화’라는 뜻도 있음)를 바라보는 지루함의 요인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영상도 배우들의 연기도 아닌 무엇을 보는 것이 영화관람 행위의 목적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삶을 보는 것이다. 지아 장커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다. <스틸 라이프>를 통해서 그는 삶을 보여주고자 한다. 영화를 보면서 삶을 보지 못한다면 영화는 단지 스틸 화면을 빠르게 돌려 흘러가는 영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정물의 연속일 뿐인 것이다. 그것이 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에 움직임이 되고 그 움직임은 무언가 의미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그 의미를 읽지 않고 영상만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정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마치 연속된 사진 연작들을 연결해 놓고 빠르게 뛰어가면서 흘깃 스쳐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래서 어찌 보면 영화는 더 이상 보는 행위가 아니고 읽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책에 수많은 글씨들이 적혀 있다. 그것이야 말로 일종의 기호체계(시니피앙)들일 뿐이다. 정지된 기호 체계들을 무심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책을 읽을 수는 없다. 그 기호들의 체계들 속에 들어 있는 의미(시니피에)들을 읽어낼 때 비로소 책을 읽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영상언어들이다. 따라서 영상은 단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읽는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아 장커의 영화, <스틸 라이프>는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이 영화읽기 행위에 충실하기를 관객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의 영화는 단 한 번도 산샤의 도시와 산샤 사람들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산샤를 마치 정물화처럼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그 정물화를 보고 있노라면 거기에 삶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곳에는 인간의 운명이 들어 있고, 개발과 파괴가 들어 있고, 모든 것이 달러화되는 마술이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진정한 삶의 가치와 덕목들도 들어 있다. 지아 장커의 영화는 한 폭의 그림처럼 보여 진다. 영화관이 마치 미술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한 폭의 그림을 두 시간 동안 바라보고 있자면 그 안에 담겨진 인간의 모든 삶이 서서히 읽혀진다.

현실, 과거와 미래의 칸타타

산밍은 16년 동안 헤어진 아내를 찾아 산샤로 흘러 들어와서 그곳의 사람들과 더불어 힘겨운 삶의 여정을 이어 간다. 셴홍은 2년 전에 집을 떠난 남편을 찾아 산샤에 와서 고요하게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산밍의 삶은 과거에 닿아 있고, 셴홍의 삶은 미래로 향해 나아간다. 산밍의 과거 지향은 고통이며, 셴홍의 미래 지향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고통의 기억이든, 두려움의 전망이든 그 궁극은 언제나 희망에 닿아 있다. 현실은 과거와 미래가 어우러진 칸탄타이다. 그 현실이 설사 아름답지 않다 해도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에 맛 닿아 있는 순간 현재라는 시간은 칸타타가 된다.

산밍에게 있어서 고통의 현실은 과거의 고통을 해결하는데 있었다. 그는 산샤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그 아내는 광부로서 살면서도 아내에게 충실했던 산밍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버리고 만다. 그렇게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산밍은 아내가 남겨준 주소 한 장 들고 산샤로 온다. 그러나 그 주소지는 산샤댐 건설로 이미 수몰되어버리고 말았다. 산밍의 경험은 언제나 상실의 경험이다. 아내의 상실, 마을의 상실, 파괴와 수몰로 인한 역사의 상실, 그리고 그러한 상실은 자연과 삶의 무대의 상실로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상실의 경험이 인류가 겪어온 경험이라고 지아 장커는 말하고 있는 것일까? 시간에 수많은 상처와 흔적을 남겨온 인류의 역사는 결국 인간의 삶의 상실로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경고처럼 가슴을 울리는 대목에서 우리는 지아 장커를 역사적 낙관주의를 포기한 지 오래된 사람쯤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사유가 멈추어 버렸다면 이 영화를 더 읽을 필요는 없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등장하는 또 한 사람의 삶, 즉 셴홍의 삶 속에서 우리는 역사 비관주의에서 그가 외치고자 했던 희망의 요소를 읽어낼 수 있다. 셴홍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현실은 미래의 전망을 찾는데 있었다. 간호사로서 안정된 삶을 누리던 그녀의 남편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일을 찾아 산샤로 떠난 지 2년이 되었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다. 그 남편을 찾아 산샤로 온 셴홍은 남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의 관계 때문에 자신을 잊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편의 변심은 인류사회가 겪고 있는 도덕적 상대성의 문제와 맛 닿아 있다. 남편의 변심이 셴홍의 미래를 두렵게 만들었듯이 오늘 우리 사회의 도덕적 상대화는 인류의 미래를 두렵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도덕적 일탈을 경험하면서 인류의 미래를 두려움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지아 장커의 비약적 세계관을 우리는 분명하게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셴홍의 시야에서 불현듯 나타나는 UFO라든지, 또는 콘크리트 건물이 로케트가 되어서 갑자기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에서 예시된 것들이다. 즉 지아 장커는 인간이 창출한 도덕적 파괴와 변화, 그로 인한 두려운 미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인간에게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시각과 더불어, 그 문제의 해결점을 결국 외부로부터 찾아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초과학적 혹은 종교적 해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이 점에서 지아 장커는 중국 공산당의 현실정치를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중국공산당이 제시하는 미래 중국의 재건이 과연 가능할까? 초월성과 종교성을 철저히 배제한 채 오로지 당의 지도력으로 미래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간의 노력에 일침을 가하면서 그러한 낙관주의는 이미 근대주의에서 무너졌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가는 또 하나의 방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미래의 해법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있다는 말인가?

행복과 희망의 현주소

지아 장커 감독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UFO, 로켓트와 같은 영상들은 인간의 덧없는 희망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때때로 그런 초월적 망상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현실의 고통이 너무 무거우면 그런 초현실적 요소로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경험하곤 한다. 셴밍의 환상은 바로 그런 것이었을까?

남편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배회하는 동안 셴밍의 현실 주위에서는 늘 자동인형과 같은 무미건조한 댄스 장면들이 등장하곤 한다. 영화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 장면들, 아니 그것들은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장면들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 속에는 늘 현실과 상관없는 장면들이 너무도 많다. 드라마의 장면들이 그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드라마의 장면들은 우리네 삶을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착각이다. 망상이다. 셴밍은 그런 착각과 망상과 더불어 존재하지만 그 비현실에 몰입되지 않는다. 무심하게 그 비현실들을 의식하지 않고 묵묵히 현실에만 몰입한다. 그래서 그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인다. 남편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묵묵히 던지고 돌아서는 셴밍의 모습에서 우리는 현실에 충실한 한 여인을 보게 된다.

그렇다. 행복은 바로 현실에 있었다. 행복의 현 주소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네잎 클로버가 행운이라면 세잎 클로버는 행복이 아닌가? 우리는 행복을 두고 행운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어쩌다 네일 클로버 하나를 발견하게 되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건 단지 행운에 불과했을 뿐인데. 행운은 찾아서 고통스러운 여정을 나선 사람들에게도 행복은 늘 지천으로 널려 있었음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착각과 망상에 의미와 목적을 두고자 하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삶의 자세 때문이다. 셴밍은 이제 남편을 찾겠다는 환상에서부터 벗어나 자신의 현실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녀는 비로소 행복에 대해 말할 수 있고 희망을 구체화할 수가 있게 되었다.

산밍과 셴홍은 담배와 술과 차와 사탕을 들고 있다. 담배 한 개비와 술 한 잔으로 사람들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런가 하면 차와 사탕은 슬픔과 고통을 해결하고 삶의 희망을 찾게 해주는 에너지와도 같은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네 가지만 있으면 가정이 행복하다고 생각해왔다. 그 중국인들의 소박한 정서를 가지고 지아 장커는 진정한 행복을 논하고 있다. 담배를 통해서 서로 나누는 소통, 술을 통해서 함께 교감하는 정서, 차를 마시면서 슬픔을 삼키는 인내, 그리고 사탕과도 같이 달콤한 희망... 철거와 파괴와 불합리와 아픔으로 얼룩진 산샤의 비참 속에서도 희망은 늘 저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래서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가슴으로 보는 울림이 큰 영화

삶이란 무엇일까? 새로운 희망을 품은 채 산샤를 떠나는 산밍의 뒤에서 한 사람이 건물 사이에 놓여 진 줄 위에 서서 위태위태하게 줄을 타고 건너편 건물로 이동한다. 그 사이에 펼쳐진 산샤의 장관과 더불어 말이다. 그 현실에 서서 줄을 타고 건너는 사람의 시각에서는 산샤의 풍경도 자신의 현실도 산밍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관찰자와 당사자의 차이일 것이다. 삶도 그렇다. 삶을 바라보는 자와 삶을 살아가는 자는 분명 커다란 시각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자인가 삶을 살아가는 자인가?

두 시간 동안 관객들은 지아 장커의 <스틸 라이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계속되는 삶을 바라보면서 그 삶의 시각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관객들이 산밍과 셴홍의 삶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을 또 읽어내려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삶과 중국의 현실을 본 것이다. 감독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관개들이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한 가지 영상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그것이 바로 밧줄을 타고 건물 사이를 건너가는 사람의 영상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산밍마저 그 장면은 자신의 삶에서 또 다시 바라보는 관객의 삶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삶과는 또 다른 삶이요, 시각이다. 따라서 산밍은 그 사람의 삶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으로 동화시킬 이유도 여유도 없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가 줄 위에서 무엇을 하든, 무엇을 보든 상관없다. 그것 역시 하나의 정물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 삶의 공간에 그림이 하나 걸려 있는 것뿐이다. <스틸 라이프>는 관객들의 삶의 공간에 걸려 있는 그림 한 점일 뿐이다. 감독의 메시지가 여기까지 미치고 있다. 정말 울림이 큰 영화가 아닐 수 없다. 그 울림으로 우리의 삶도 계속되어야 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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