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보는남자
칸의 시상식장에서 ‘전도연’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울려나왔다. 온 국민이 기뻐하고 있을 순간, 나는 혼자 엉뚱한 착각에 놀라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알랭 들롱이 금메달을 걸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단상에 올라간 밀양 아가씨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벅찬 애국가를 불러야 하지 않나? 그래 순전히 내 잘못이다. 칸으로 달려간 우리 카메라들이 올림픽 중계를 하듯 수상 가능성을 점치고, 본사에 속보를 보낼 준비로 땀을 뻘뻘 흘리더라도, 그저 그러려니 했어야 한다.
대종상으로 무대를 옮겨오면, 솔직히 이제 누가 상을 타느냐에는 별 관심이 없다. 마치 올림픽 중계를 보다가 전국체전으로 채널을 돌린 듯하다. 대신 여기에서는 ‘누가 시상식장에 나오냐’가 중요해진다. 전국체전에서 ‘한국 수영의 초신성(超新星)’ 박태환의 출전 여부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처럼. 하지만 칸의 여왕 전도연도 우리 시선의 한가운데 오리라는 보장은 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레드 카펫에서 더 화려한 드레스, 더 확실한 노출을 보여주는 여배우가 진짜 주인공이다. 김혜수는 〈타짜〉 이전에도 일 년에 한 번씩은 여왕이었다.
사실 나는 꽤나 자부하는 시상식 애호가다. 아카데미, 에미, 그래미, 토니 등은 몇 주 전부터 홈페이지를 체크하고, 올해의 사회자는 누구인지, 초대 스타는 누구인지를 살펴보며 두근두근한다.
물론 누가 어떤 상을 탈까 궁금해하는 마음이 시상식의 흥분을 만들어내는 핵심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즐거움이 있다. 이들 시상식은 바로 그해 최고의 인기와 실력을 보여준 스타들이 총출동해서 만들어내는 그해 최고 수준의 쇼이기 때문이다.
나의 기대는 온갖 빛깔로 출렁인다. 아카데미 사회를 맡은 크리스 록의 그 센 이빨에 초대 스타들은 얼마만큼 인내력을 발휘할까? 마이크 무어는 또 어떤 말로 부시 대통령의 속을 뒤집을까?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에 이어 마돈나의 키스 세례를 받을 여가수는 누구일까? 냉소적 유머라면 시트콤 작가와 코미디언들이 대거 등장하는 에미상이고, 화려한 무대라면 뮤지컬 갈라 콘서트장인 토니상이고, 일촉즉발의 사고를 기대한다면 역시 엠티브이(MTV) 뮤직 어워드다.
지난달 칸과 대종상에 시큰둥해진 나에게 그래도 위안이 되는 친구가 있었다. 젊은 세대들을 위한 오락영화 시상식 ‘엠티브이 무비 어워드’. 상의 권위는 진작 엿 바꿔 먹고, 그냥 웃고 즐기기로 작정했다. 사회자는 영화와 합성 화면으로 브래드 피트, 맷 데이먼 등에게 시상자로 오라고 부탁하다가 퇴짜 맞는 장면을 보여주고, 마이크 마이어스는 수상 소감을 대신 써준 비서에게 감사한다. ‘아직 개봉 안 한 여름영화’까지 시상하며 황금팝콘 트로피를 선사하니, 그 자체가 세상 모든 시상식에 대한 패러디다.
이명석/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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