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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저공비행] 연쇄살인마를 사랑하는 사람들

등록 2007-08-19 21:37

연쇄살인마로 유명해지는 것은 쉽다. 얼마 전에 데이비드 핀처가 멋진 영화의 소재로 삼은 ‘조디악 살인마’를 보면 그때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정체가 무엇이고 진짜 이름이 무엇이건, 조디악 살인마는 그렇게 대단한 재능이나 창의성을 과시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살인 방법은 그냥 단순했다. 외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총질을 하거나 칼을 휘둘렀다. 그의 협박편지는 졸렬했고, 그가 만든 암호는 애들 장난 정도였다. 그가 체포되지 않은 건, 아직 과학수사가 발전하지 못했던 옛날이었기 때문이고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전설이 되었다. 도대체 이유는 뭔가?

간단하다. 대중이 연쇄살인이라는 ‘예술’을 평가할 때 질은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신경 쓰는 건 양과 강도다. 19세기 유럽이라면 공들여 저지른 예술적인 범죄 한 건으로 살인범이 명성을 떨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옛날 일. 이제는 머릿수로 대중을 압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통적인 영국식 살인의 쇠퇴를 아쉬워했던 조지 오웰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조디악 살인마와 같은 작자들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그냥 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가? 살인은 여전히 중요한 범죄이고 그만큼이나 중요한 뉴스이다. 아무리 우리가 연쇄살인마의 졸렬한 창의력과 재능을 비웃고 싶어도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는다. 죽음은 아무리 진부하고 ‘예술적’이 아니라도 여전히 죽음이며, 죽은 사람들은 여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다보면 피에 자극되어 살인마의 뒤를 따르는 팬들이 생겨나고 명성이 시작된다. 그런 것들을 보다보면 살인마만큼이나 불쾌한 인물들을 보게 된다. 잘생긴 연쇄살인마에 열광하는 오빠 부대도 있고 심지어 그런 살인마와 옥중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핀처의 영화 〈조디악〉의 주인공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도 사실은 조디악 살인마의 팬이다. 그가 십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조디악을 추적하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이게 팬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닐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정의 실현이나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가 관심이 있는 건 주기적으로 떡밥을 던져주는 연쇄살인마 자체이다. 그를 추적하고 정체를 밝히는 것은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이름을 불리고 집에서 저녁 초대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광이다. 그는 조디악 살인마 바로 옆에서 그와 함께 명성을 누리게 된다. 물론 살인마가 앞으로 누릴 명성에 비하면 하찮겠지만.

그레이스미스의 경우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그 소재로 책을 써서 돈을 벌었고 그 뒤로도 범죄 실화 관련 책들을 쓰면서 잘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엔 그레이스미스처럼 본전을 뽑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리고 난 지금 연쇄살인마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다.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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