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요즘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 〈하우스〉를 보면서 느낀 건 그동안 환자들이 많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요샌 주인공인 환자들 중 성질 더러운 괴짜 의사 하우스의 모욕을 그대로 받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하우스의 이죽거리는 말을 듣는 바로 그 순간 그만큼이나 날카롭고 야비한 유머로 받아친다.
여기서 내가 재미있게 느끼는 건 이들 중 단수가 높은 사람들은 그냥 완치되면 보통사람으로 돌아가는 환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병적으로 비만인 남자나 왜소증 환자처럼 거의 영구적인 장애인이거나 로마니(집시)처럼 소수자로 구분되는 사람들이다. 하우스는 이들의 장애를 노골적으로 놀려대지만 그 정도는 어림없다. 이미 그들은 그런 관점에 수십 년 동안 단련이 되어 그에 대한 반박문도 마련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가 야무진 지적 훈련이 되어 있는 영리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 같은데, 소수자에 대한 이런 묘사는 우리에게 무척 신선해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 시청자들은 그들이 동정과 연민의 영역을 넘어서서 움직이면 당황한다. 우리의 얄팍한 고정관념에 따르면, 그들은 〈인간극장〉에 나와 시청자들의 누선을 자극하는 것이 유일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하우스〉의 경쾌한 블랙 코미디는 이 소수자들이 실생활에서 자기만의 자존심을 갖추고 있고 그 바탕에서 정상에 가까운 사회생활을 하는 시스템 안에서 가능하다. 아마 그중 가장 노골적인 건 다리를 저는 하우스가 하반신 마비인 의사에게 빼앗긴 장애인 주차구역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장면일 텐데, 고등교육을 받은 최고의 지성인이어야 마땅한 이 두 장애인이 휠체어를 몰고 다니며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싸우는 장면은 우리나라에선 연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확히 같은 이야기라도 아직 여물지 않은 시스템 안에서는 모욕적으로 보인다. 우린 그냥 특정 대상에 대한 선입견을 포기할 수 없다. 일단 그러기 위한 조건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교육방송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에서는 2005년 밴쿠버 시장으로 선출된 샘 설리번의 선거운동을 다룬 〈시민 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샘 설리번에게 특별한 점은 그가 19살 때 스키 사고로 목을 다쳐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극장〉에서라면 그는 역경을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한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 샘〉에서 그는 필요하다면 자신의 장애도 이용하고 기회만 나면 상대방 후보에 대한 폭언을 일삼는 교활하고 뻔뻔스러운 남자이다. 샘 설리번의 과실과 업적에 대해서는 나중에 할 말이 많겠지만, 다큐멘터리만 보면 장애인들을 돕는 캐나다의 시스템이 거의 완벽하게 작동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샘 설리번은 그 끔찍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정상적인 정치가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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