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콴타나모로 가는 길>을 보고서
이 영화를 처음 볼 뻔했던 것은 작년이였다.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열렸던 유럽영화제를 가서 보려고 하다가 다른 영화와 시간이 겹쳐서 포기를 했다. 그랬던 영화를 길거리에서 불법DVD로 구해서 시청하였다. 최근엔 극장개봉도 했었다. 스크린 수도 워낙 적고, 진보적인 영화들이 그렇듯 대중의 관심권 밖이라 개봉했는지도 모르고 지나갈 뻔 했다.
한국에서 911은 무었일까? 이스람세계에서 911은 무었일까? 아마도 그것은 미국인들의 911과는 다를 것이다. <콴타나모로 가는 길>은 서구의 감독이 제작한 영화지만 어느정도는 이슬람세계인들의 입장에서 911사태 이후 벌어진 일들을 조망한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되 보여주는 바가 대단한 영화다. 911사태 이후 개인적인 일때문에 파키스탄으로 여행을 떠났던 4명의 청년이 피부색을 이유로 911관련자로 누명을 쓰고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꾸준히 생각나는 것은 "권력관계"에 대한 것이였다. 청년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을 911관련자로 몰아사 처형도 할 수 있는 정보기관의 사람들과 그런 상황에 저항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청년들. 마치 우리나라의 군사정권시절 빨갱이로 몰려서 억울하게 옥고를 치루거나 처형된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상황을 담담하게 그려놓고 있다는 점이 내게는 오히려 불만이 되었다. 영화라는 장치까지 동원하였는데, 그들간의 권력관계를 통쾌하게 뒤집어 놓을 수는 없었을까? <콴타나모로 가는 길>은 마치 다큐멘타리처럼 처리가 되어있다. <콴타나모로 가는 길>은 극적인 구조를 가진 드라마는 아니다. 늘 아닌 것에서,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찾는 습관때문인지 몰라도 <콴타나모로 가는 길>이 이런 형식의 영화이기보다 서구인들과 이슬람인, 정보기관요원과 이슬람민중의 권력관계를 뒤집어 놓는 영화였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진보적인 소재나 주제를 다룬 영화는 객관주의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진보주의자 영화감독이 자신의 메세지의 전달을 위해서 객관주의를 채택하지 않는 경우는 <화씨911>의 마이클 무어 감독정도 밖에는 본적이 없다. 무어 감독은 객관적인 다큐멘타리를 찍는 채 하지만 철저하게 당파적인 영화를 찍고, 경우에 따라서는 '조작(manipulation)'도 한다. 창작자가 사실검증에만 메몰되지 않고 텍스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콴타나모로 가는 길>을 보는 내내 불만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슬람이나 아프리칸, 동남아인들은 영화에서마져 피동적 객체와 수동적 주변으로 전락해야 할까? 감독이 미국인이거나 유럽인인한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인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꾸준히 생각나는 것은 "권력관계"에 대한 것이였다. 청년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을 911관련자로 몰아사 처형도 할 수 있는 정보기관의 사람들과 그런 상황에 저항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청년들. 마치 우리나라의 군사정권시절 빨갱이로 몰려서 억울하게 옥고를 치루거나 처형된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상황을 담담하게 그려놓고 있다는 점이 내게는 오히려 불만이 되었다. 영화라는 장치까지 동원하였는데, 그들간의 권력관계를 통쾌하게 뒤집어 놓을 수는 없었을까? <콴타나모로 가는 길>은 마치 다큐멘타리처럼 처리가 되어있다. <콴타나모로 가는 길>은 극적인 구조를 가진 드라마는 아니다. 늘 아닌 것에서,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찾는 습관때문인지 몰라도 <콴타나모로 가는 길>이 이런 형식의 영화이기보다 서구인들과 이슬람인, 정보기관요원과 이슬람민중의 권력관계를 뒤집어 놓는 영화였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진보적인 소재나 주제를 다룬 영화는 객관주의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진보주의자 영화감독이 자신의 메세지의 전달을 위해서 객관주의를 채택하지 않는 경우는 <화씨911>의 마이클 무어 감독정도 밖에는 본적이 없다. 무어 감독은 객관적인 다큐멘타리를 찍는 채 하지만 철저하게 당파적인 영화를 찍고, 경우에 따라서는 '조작(manipulation)'도 한다. 창작자가 사실검증에만 메몰되지 않고 텍스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콴타나모로 가는 길>을 보는 내내 불만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슬람이나 아프리칸, 동남아인들은 영화에서마져 피동적 객체와 수동적 주변으로 전락해야 할까? 감독이 미국인이거나 유럽인인한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인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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