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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낡음’의 미학 아시나요

등록 2007-09-30 19:47

저공비행
옛날 영화들의 필름을 보존하려 열심히 뛰어다니는 마틴 스코세이지를 보고 언젠가 고다르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할까? 어차피 모든 건 낡기 마련인데 그냥 낡은 대로 보지.” 되게 재수 없는 소리이고 그만큼이나 쓸모없는 소리이기도 하다. 스코세이지의 노력 때문에 우리의 후손들은 좋은 화질로 20세기의 고전들을 감상하겠지만 고다르의 빈정거림으로 득을 볼 사람은 누가 있을까?

그런데 고다르의 말이 맞긴 하다. 세상 대부분의 것들은 세월 속에서 낡아가며 사라진다. 필름도 마찬가지. 우리가 늙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처럼 옛날 영화들을 낡은 필름으로 보는 건 그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낡은 필름에는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데쓰 프루프〉에서 일부러 필름에 생채기를 내고 중간중간을 끊어먹어 마치 한 30년 묵은 구닥다리 영화처럼 만든 것도 그가 그 매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그라인드하우스(동시 상영극장) 영화들의 프린트가 너무 깔끔하다면 그것도 재미가 없을 것이다.

이건 영화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낡은 책들과 낡은 엘피(LP)들은 수십 년 먹은 낙서를 담고 있거나 중간중간에 탁탁거리는 잡음을 낼 때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은 그들이 담고 있는 텍스트나 음악과는 별도로 또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 인생의 이야기다. 상처가 생기고 낙서가 늘어나는 동안 그 낡은 책들과 엘피들은 같이 태어난 자매들이 가지지 못한 고유의 개성을 얻는다.

일부러 나이를 먹인 필름 말고도 〈데쓰 프루프〉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미국 구식 머슬카 두 대의 자동차 추격장면인데, 처음엔 외딴 시골길에서 달리던 두 자동차들은 갑자기 도로로 접어들어 막 공장에서 빠져나온 듯 반들반들하고 동글동글한 신식 차들 사이에 끼어든다. 치고 받는 결투로 몸이 상할 대로 상한 낡은 차들이 생채기라도 날까봐 조심조심 기어가는 후배들 사이에서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타란티노는 아마 “상처나 죽음 따위는 겁내지 마! 바로 이게 사는 거야! 이 겁쟁이들아!”라고 외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필름과 낡은 자동차들을 우리네 인생의 은유로 삼고 싶어도 발전은 멈출 수 없다. 결국 엘피가 시디와 엠피3로 전환된 것처럼 필름도 언젠간 모두 디지털로 전환될 것이고 미래엔 비 내리는 화면이나 퉁퉁 튀는 필름, 화면 위의 담배 자국과 같은 건 모두 역사의 유물로 남을 것이다. 아마 그때쯤 되면 완벽한 피부노화 치료법이 나와 60살 할머니도 18살 소녀와 같은 외모로 돌아다닐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때 사람들은 〈데쓰 프루프〉의 일부러 썩힌 필름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를 수도 있겠다.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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