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바르게 살자>
영화 <바르게 살자> 보고 나서, 장진 감독의 영화를 본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좀 꽤 있겠다. 라희찬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장진이 각본을 썼지만, 장진 감독이 기존에 보여줬던 영화적 색깔이 이곳 저곳에 워낙 많이 묻어 있어 '장진표 코미디'란 수식어를 붙여도 크게 어색함이 없다. 신인감독에게서 좀 더 도발적이고 신선한 자극을 기대하며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다소 아쉬울 수 있겠지만, 어찌하랴. 상업적 이윤에만 눈이 먼 극장가에서 살아 남으려면 보수적인 안정감이 훨씬 시장에서 먹히는걸. 라희찬 감독만이 표현할 수 있는 신선한 영화는 다음 영화에 기대하자.
영화의 이런저런 미덕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장진표 코미디 영화의 반복이라고 폄하해 버리기엔, 영화적 재미와 던지는 메시지가 범상치 않다. 롤러코스터 타듯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소비적 재미'는 물론 아니다. 장진이 설마 그런 각본을 쓰겠는가. 극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상황들과 등장인물들의, 역시 부조리한 행동들의 의미를 분석하는 '생산적 사유의 재미'가 펼쳐진다. 이 재미의 중심엔 논쟁적 캐릭터 '정도만'이 놓여 있다. 이 영화가 단순하고 관습적인 코미디 영화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었던, 유쾌하고 의미있는 이유의 팔할은 '정도만' 이라는 캐릭터가 제공한다.
경찰 '정도만'은 새로 부임하는 경찰서장의 차를 세워 속도위반 딱지를 끊을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이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눈치껏 행동할텐데, 그에겐 그런게 없다. 융통성이 코딱지만큼도 없는 '정도만'의 행동은, 법과 원칙을 최선의 가치로 여겨야 할 경찰 조직에서 칭송의 대상이 돼야 하지만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도 '정도만'을 보고 웃는다. 하지만 마냥 웃기에는 죄책감이 든다. 영화 속 현실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빼다 박았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조리'있게 살려는 생각이 얼마나 코믹한 것인지를 대리체험한다는 것이 그리 편한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며 자연스레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분명 이 영화가 빚는 생산적 열매들이다.
영화 곳곳에서 엇박자를 타는 연출이 빚는 리듬 또한 이 영화의 코미디적 재미를 잘 살린다. 원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던져졌을 때 겪는 일종의 당황스러움이 큰 웃음을 유발하는 법. 영화는 이런 당황스러움을 곳곳에서 효과적으로 잘 활용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정도만'이 은행에서 경찰 서장이 시킨 가짜 강도 역할을 하며, 사람의 머리를 총으로 '빵' 하고 쏜다. 화면은 정지되고, 관객은 그 다음 장면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될 끔찍한 상황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장면은 피가 낭자한 은행 바닥과 시체들이 아니라, 죽은 척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의 목에 '죽었음' 이라 씌여 있는 명찰 뿐이다. 포복절도할 만한 유머는 아니지만, 나름 웃긴다. 관객의 뒤통수를 때리는 상황의 유머가 오히려 더 여운이 긴 법이다. 최근 한국 코미디 영화들은 억지 대사를 남발하거나 말초적 충격을 던지며 손쉽게 코믹한 상황을 연출하는 데 익숙한데 <바르게 살자>가 이런 의미없는 코미디 영화들을 답습하고 있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바르게 살자>가 가진 영화의 미덕이 하나 더 있다. 비극과 희극이 교차하는 한편의 풍자적인 소극장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부조리극의 매력을 십분 살렸다. 부조리극의 매력은 부조리한 상황 속에 던져진 우리의 '영웅'이 그 상황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겪는 좌절과 고민을 관객이 함께 체험하는 데 있다. 그런 과정에서 관객은 자연스레 우리 사회의 모순을 발견하고, 극은 관객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을 질문한다. '당신은 왜 사는가. 당신이 삶에서 찾는 목적과 의의를 세상은 쉽게 던져주지 않는다. 당신은 이런 부조리 속에 무엇을 할 것인가.' 영화는 '정도만' 이라는 캐릭터를 이용해 관객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던지는 질문이 많아 관객은 영화를 보며 결코 지루할 틈이 없다.
바르게 살자. 하지만 바름은 뭔데?
하지만 감독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바르게 살자' 고 권하는 것은 좋았지만, '바름은 뭔가' 에 대한 질문에는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 아쉽다. 인물 '정도만'이 경찰 사회 내에서 원칙을 지키고 직장 상사의 말을 충실히 듣는 것은 옳아 보일 수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바르게 살자는 것이 꼭 법을 잘 지키며 살자는 것으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가끔 말도 안되는 명령을 하는 직장 상사에게 소신있게 저항하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일 수도 있다. 때로 바르게 산다는 것은 비인간적이다.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먹고 죽어갈 때 '법을 어긴 사람이니까' 죽어도 싸다고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비인간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럴까. 인물 '정도만'에겐 표정이 없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무표정이다. 관객은 그의 표정을 보며 웃지만, 그는 절대 웃지 않는다. 마치 바르게 사는 것은 무표정한 시체의 삶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듯 하다. 이게 이 영화의 숨겨진 또 다른 메시지라 해석하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영화는 이렇게 '바름'의 모호한 단서들만 나열한 채 뚜렷한 답을 던져주지 않아 답답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시종일관 관객들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나열해 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웃지만 웃기지 않는 최근 한국 코미디 영화를 답습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큰 가치가 있다. 시사회 도중, 많은 관객들이 '하하하' 하고 웃었다는 것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인 라희찬 감독이 만든 장진표 코미디 영화 <바르게 살자>의 여운은 꽤 길 것 같다. 올 가을, 정말 재미있는 영화 한편 만나길 기대하고 있었다면 이 영화를 망설임 없이 추천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도만은 매우 바르게 사는 고지식한 경찰이다.

연습인줄 알았던 경찰 정도만의 강도짓이 심각해진다.

내가 죽는 게 죽은 게 아니야~

언제나 무표정한 경찰 정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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