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행복> 은 대중적인 상업영화다. 하지만, 왠지 이 영화를 보고, 정리해두지 않으면, 훗날에, <클래식> 이나 <엽기적인 그녀> 쯤 되는 평범한 연애 스토리로 기억하게 될 것같다. 그런 불행을 없애기 위해, 다분히 조잡하고 난해하지만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인 글로써 내 생각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일부 '공개' 된다는 전제하에 쓰여지는 글이기 때문에 줄거리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자 한다.
어찌보면 평범한..
영화 <행복> 은 현실적인 러브스토리다. 영화의 스토리만 따지자면, 치밀한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도 그럴것이, 멜로 영화라는 타이틀을 걸고 나온 작품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뻔한 러브 스토리'라고 말해도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제법 있을법한 연애담 속에 숨쉬고 있는 현실의' 잔인함'과 사랑의 '허영심'은 결코 영화를 가벼운 의미에 머물도록 하지 않았다. 특히, '사랑'이라는 인간의 위선속에 벌거벗은 사람의 감정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면서 감독은 현재 사랑을 진행중에 있거나, 꿈꾸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시에 질문한다.
"당신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이야기 보따리를 받은 관객
영화 '행복'은 영상으로 전달하지 못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감독은 거의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감추면서 많은 정보들을 관객들로부터 차단시켰다. 때문에 영화를 관람하는 중간중간에 관객이 능동적으로 상상하거나 추측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것이 감독의 의도로 이해했다. 즉, 현실의 이야기와 가까워 지기 위한 의도된 장치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직접 보거나 겪지 못한 것에 있어서, 다른사람의 말이나 글에 의존한다. 즉 간접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의미의 전달 과정, 즉 현실 속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사람들은 각자의 상상력과 추측을 동원한다. 그 이유는 '실체'가 무엇이든간에, 그것이 어떤 여과장치, 특히 사람이라는 여과장치를 거치게 되면 변질되기 때문이다. 즉, 서사의 과정에서는 언제나 '왜곡'되고, '생략'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또한, 중요한 점은 이야기속에서 감동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말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듣는 사람의 역할인 '감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요구하는것도 바로 그랬다. 은이(임수정)와 영수(황정민)의 현재는 영화 속에는 드러나 있지만, 그들의 과거는 철저히 관객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묘한 카라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그 장치는, 관객의 끝없는 추측과 상상속에서 '서사'를 현실 가능한 형태로 재구성하게 만들었다. 영화를 현실과 매우 가깝게 만들어 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관객은 퍼낼수록 자꾸만 생겨나는, 이야기 보따리를 받은 셈이다.
영화 <행복> 속의 관계 은이(임수정)의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다. 그래서 일까 그녀의 사랑은 현실에서 천대받고, 믿음으로부터 배신당한다. 진정한 사랑을 추구했던 결과는 비참했던 것이다. 정반대로 영수(황정민)는 '열정적 사랑' 으로 시작하지만, 더이상 '순수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카사노바적인 사랑으로 곧잘 전락해버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일반화된 관계의 추구를 하고있다. 은이가 영수로부터 '미래'를 보았다면, 영수는 은이로부터 '현재'만을 빼앗아 갔다. 어쩌면 영화 <행복>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와 비교해 볼 수도 있겠다. 두 작품 모두, '관계'의 간절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술' 이라는 중독성 매개를 적극 활용했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면 애쓸수록, 정신을 지배하는 악마는 인간의 나약함을 조정할 뿐이다. 사람이 관계에 놓여있는 동안 얼마나 하찮은 실수를 범하는지, '술' 과 '사랑' 이라는 두가지 중독적 매개로서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물의 설정이 조금만 엇갈리고 결말만 다를뿐이지 영화속 '관계'를 묘사한 철학에 있어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와 <행복>은 비슷하다. 하지만 강조점은 틀린 것 같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알콜중독자 벤(니콜라스 케이지)과 창녀 세라(엘리자베스 슈)가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만났지만,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는 어쩔수 없이 '순수한 관계'로의 추구를 지향한다. 사랑에 대한 인간 본연의 그리움을 표현했다고 본다. <은이: 영수씨 나 얼만큼 사랑해요?> <영수: 이런게 있긴 있구나..> 영화 <행복> 은 영수(황정민)의 대사 (사랑하냐는 질문에) " 이런게 있긴 있구나.." 에 의해서도 암시 되듯이, '순수한 관계'를 이룬 듯 보였지만, 오히려 그런 사랑의 완성 앞에 망설이고 겁먹고 , 결국엔 무너지는 인간 내면의 나약함을 좀 더 부각시켰다. 훌륭한 연기!! 무엇보다도 이런 영화적 표현은 주연배우들의 열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황정민의 가식적이지 않은 감정표현과 선과 악을 넘나드는 수준 높은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혐오'와 '분노' '증오', 때론 '믿음'의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불러 일으켰고, 감독의 의도인 '행복'이란 가치를 간절히 원하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임수정의 귀여운 외모와 절제된 연기도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에 있어 절묘하게 작용했다. 죽어가는 두 남녀가 '사랑'을 만났다. 거의 기적적으로 그 둘은 모두 살 수 있었다. 오로지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생명과 행복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생명, 그리고 행복. 이 두가지를 위해 두남녀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위선에 가까운 사랑의 실체는 남자에게서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결국 버림받은 여성은 목숨을 잃고 만다. 관계를 통해 생명을 이어갔으니, 관계를 잃으면 죽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모든 사랑은 향기처럼 사라지고, 남자는 또 다시 죽어간다. '행복'이란 오로지,, 관계속에서 빛을 발하는 보물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영화 <행복> 속의 관계 은이(임수정)의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다. 그래서 일까 그녀의 사랑은 현실에서 천대받고, 믿음으로부터 배신당한다. 진정한 사랑을 추구했던 결과는 비참했던 것이다. 정반대로 영수(황정민)는 '열정적 사랑' 으로 시작하지만, 더이상 '순수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카사노바적인 사랑으로 곧잘 전락해버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일반화된 관계의 추구를 하고있다. 은이가 영수로부터 '미래'를 보았다면, 영수는 은이로부터 '현재'만을 빼앗아 갔다. 어쩌면 영화 <행복>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와 비교해 볼 수도 있겠다. 두 작품 모두, '관계'의 간절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술' 이라는 중독성 매개를 적극 활용했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면 애쓸수록, 정신을 지배하는 악마는 인간의 나약함을 조정할 뿐이다. 사람이 관계에 놓여있는 동안 얼마나 하찮은 실수를 범하는지, '술' 과 '사랑' 이라는 두가지 중독적 매개로서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물의 설정이 조금만 엇갈리고 결말만 다를뿐이지 영화속 '관계'를 묘사한 철학에 있어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와 <행복>은 비슷하다. 하지만 강조점은 틀린 것 같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알콜중독자 벤(니콜라스 케이지)과 창녀 세라(엘리자베스 슈)가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만났지만,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는 어쩔수 없이 '순수한 관계'로의 추구를 지향한다. 사랑에 대한 인간 본연의 그리움을 표현했다고 본다. <은이: 영수씨 나 얼만큼 사랑해요?> <영수: 이런게 있긴 있구나..> 영화 <행복> 은 영수(황정민)의 대사 (사랑하냐는 질문에) " 이런게 있긴 있구나.." 에 의해서도 암시 되듯이, '순수한 관계'를 이룬 듯 보였지만, 오히려 그런 사랑의 완성 앞에 망설이고 겁먹고 , 결국엔 무너지는 인간 내면의 나약함을 좀 더 부각시켰다. 훌륭한 연기!! 무엇보다도 이런 영화적 표현은 주연배우들의 열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황정민의 가식적이지 않은 감정표현과 선과 악을 넘나드는 수준 높은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혐오'와 '분노' '증오', 때론 '믿음'의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불러 일으켰고, 감독의 의도인 '행복'이란 가치를 간절히 원하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임수정의 귀여운 외모와 절제된 연기도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에 있어 절묘하게 작용했다. 죽어가는 두 남녀가 '사랑'을 만났다. 거의 기적적으로 그 둘은 모두 살 수 있었다. 오로지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생명과 행복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생명, 그리고 행복. 이 두가지를 위해 두남녀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위선에 가까운 사랑의 실체는 남자에게서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결국 버림받은 여성은 목숨을 잃고 만다. 관계를 통해 생명을 이어갔으니, 관계를 잃으면 죽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모든 사랑은 향기처럼 사라지고, 남자는 또 다시 죽어간다. '행복'이란 오로지,, 관계속에서 빛을 발하는 보물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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