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궁녀 출연진들.
여고괴담의 작렬하는 흥행 이후. 해마다 여름이면,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씨-즌 가리지 않고, 꾸준히 각종 공포영화가 제작됐다. 공포는 웃음만큼이나 다른 문화 간에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문화의 감성체계다. 공포영화 매니아로써 한해에 몇편씩 공포의 감성을 공유하는 자국 공포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나는 여름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씨-즌 가리지 않고, 극장에서 개봉하는 온갖 공포영화를 기다리며 산다. 공포영화 매니아인 나는 남들이 개-떡같다고 손가락질 하는 공포영화를 볼 때도 찰떡같이 내멋대로 해석하고 한껏 고무될 준비가 되어있는, 말그대로 '매니아'다. (심지어는 60~70년대에 만들어진 월하의 공동묘지나 장화홍련 시리즈도 기껍게 소화한다) 최근 한국영화의 전반적인 질적 상승과 더불어 한국 공포영화들도 소위 때깔 좋게 진화 발전을 하고있는 중이다. 그런데 점점 개-떡 모양새를 했을지언정 찰떡같은 맛을 주는 공포영화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찰떡의 모양세를 갖추고 나타난 최근의 영화들에는 찰떡과 개-떡만이 갖는, 쫄깃한 특성이 배제되어 있다. 대체.....무엇일까? 영화 [궁녀]에는 구중궁궐에서 표면적인 욕망을 거세당한 궁녀들의 다양한 욕망을 볼 수 있었다. 임금 한 사람만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건강하고 젊은 여인으로써의 욕망, 어쩌다 왕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고 총애를 받더라도 더 높은 곳을 향해 왕이 될 아들을 갈구하는 욕망, 궁녀들 안에서의 권력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욕망,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게 사건의 진실을 향해 돌진하고자 하는 욕망...욕망...욕망. 그리고 그런 관계의 중심에는 장희빈을 중심으로 한 왕자 잉태, 세작 책봉과 관련된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오~우!' 할만큼 신선한 구미를 느꼈으며, 영화가 다수의 삑사리를 낸다 하더라도 '내 찰떡같이 너([궁])를 바라봐 주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개봉 첫날 극장을 찾았다. 영화[궁녀]는 때깔 좋은 영화다. 배우의 연기도, 미술도, 전체적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난해하지 않게 풀어내는 드라마도 '제법'이었다. 그런데 '쫄깃'이 없었다. 대체...무슨 상황일까?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은 다양하다. 귀신이 될 수도 있고, 괴물이 될 수도 있고, 살인이나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일 수도 있으며, 좀비처럼 인간도 귀신도 제3의 괴물도 아닌 존재들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공포감을 제대로 느끼느냐는 어느 인자를 사용하느냐가 아니다. 어느 인자가 되었던 그것을 제대로 사용했느냐 다. 최근 만들어졌던 때깔 좋은 한국 영화에 빠져 있던 쫄깃함은 영화의 미적 완성도 문제나 영화에서 공포를 주는 대상이 무엇이었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된 공포의 대상이 상황에 걸맞지 않거나 영화 속에서 적절히 활용되지 모했던 데 있었다.
궁녀에서는 수많은 이야기를 잘 짜진 비단처럼 잘 엮어 가다가 마지막에 모든 이야기를 장희빈의 언니이자 왕자의 생모인 궁녀(서영희) 귀신의 짓으로 몰아간다. 그때까지 박진희를 제외하고 궁녀 살인사건을 은폐하려던 궁 안의 모든 여자들의 행동이며, 줄줄이 죽어나간 다른 궁녀나 여자들은 귀신이 안되고 서영희 딱 한명만 귀신이 되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지가 죽어서도 아들이 왕이 되기만을 욕망하는 궁녀 귀신의 짓으로 설명된다. 아니....왜? 도대체 왜? (내가 귀신인데 그 정도 능력이 되면 장희빈에 빙의되는 대신에 왕의 몸에 빙의가 되겠다) 장희빈을 희대의 요부요 악녀로만 해석하던 과거에 비하여 장희빈에 대한 다각도의 해석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 동시에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장희빈의 욕망이나 행보를 원귀에 빙의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닥 흥미롭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다. 어느 여인이 사랑의 배타성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며 어느 어머니가 자기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마다하겠는가. 왕을 사랑하고 아들을 얻은(자기가 낳았던 안낳았더) 살아있는 장희빈의 욕망이야 말로 모든 사건을 극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에너지인 동시에 없는 귀신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초월적 힘이다. 이런 타인의 욕망이나 또 우리 자신의 욕망이야 말로 진정 무서운 것이다. 왜 꼭 누군가 죽어서 귀신이 되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욕망을 대변할 수 있고, 실현(?)된다고 생각하는지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한참동안 안타까왔다. 그런 면에서 궁녀는 색깔 이쁘게 빠진 무지개-떡같은 영화이기는 했지만 진정 찰떡같은 즐거움을 주는 데는 실패했다. 레지던트 이블의 엘리스처럼 장희빈이 직접 은장도니 활이라도 휘두르며 사람을 죽이거나 궁을 뛰어다니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짓인 줄 알았더니 귀신이었다는 이야기보다는, 귀신의 짓인 줄 알았는데 타버릴듯 빨갛던 사랑과 욕망을 품었던 여자의 짓이었다는 이야기가 훨씬 매력적이고 슬프지 않았겠느냐는 안타까움이다. 찰떡 맛을 잃은 최근 한국공포영화 중 상당수는 영화 후미에 가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원귀에게 묻는 우를 범한다. 영화 제작을 하는 입장에서는 공포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귀신을 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며, 귀신을 봐야 공포를 느낀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포영화를 보는 관객은 귀신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마주하러 온다. 공포의 이유가 설득력을 갖고 공포의 존재가 납득 가능할 때 영화의 공포는 객석으로 전달된다. 기대가 너무 커서 이빨이 무르게 꽂힌 [궁녀]를 보고 나올 땐 기분이 허황돼졌다. 개-떡을 줘도 좋으니 찰떡의 쫄깃함을 담은 공포영화는 정녕 올해는 아니 오려는가.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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