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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탈정치적, 탈이데올로기적인 영화는 가능한가?

등록 2007-10-30 21:22

이명세 감독 영화 <엠>
이명세 감독 영화 <엠>
[리뷰] 이명세 감독의 <엠>
오늘 이명세 감독의 <엠>을 보았다. 하지만,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는 것이 별로 많지 않다. 영화보는 내내 다른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엠>은 확실히 흔히 말하는 미쟝센이 우수한 영화다. 그건 이명세 감독의 특장점이라고 말해지기도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 완성도가 특히 높았다. 그냥 찍은 것이 아니고, 장면장면 만들어 나간 샷과 미장센이 돋보이는 영화다. 한 가지 문제를 삼는다면 기법상으로 영화라는 미디어의 내재적 전통을 따르기 보다는 광고의 영상학을 많이 차용한 듯 하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영화와 정치, 영화와 이데올로기에 관한 의문이다. 이런 질문은 일전에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에서도 한번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천년학> 또한 영상미에서는 세계수준의 작품이지만 난 이 영화를 본 후 <천년학>이 수려한 영상미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너무 고답스러운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었다.

<엠>은 <천년학>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엠>의 특징적인 면은 역사와 사회가 탈각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어디에서도 그 현재성을 찾아볼 수는 없다. 사실, 내가 봐온 이명세 감독의 작품이 대다수 역사와 사회가 탈각되어 있어서, 이명세 감독의 작품을 평가할 때 "정치적으로 올바름( politically-correctness)"이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적절함"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할 지도 의문이지만 영화라는 지적경험의 결과물을 산출하기 위해서 두 가지만 문제를 제기하여 본다.


첫째, <엠>의 탈역사화와 탈사회화는 정도가 심하다는 것이다. <엠>을 보면, 향수어린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지만 그 어디에도 구체적인 사회와 역사는 없다. 그것도 전혀없다. 단지 과거로 짐작되는 장소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현재시점으로 돌아오면 거기에도 진지하고 살아있는 갈등구조란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 <엠>의 화려한 미장센을 빠져나와서는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봐도 당대의 역사와 사회를 짐작해보는 사람들에겐, <엠>이란 화려한 색상과 구도, 조명이 언뜻 뇌에 각인시킨 자국에 다름아니다. 내러티브조차 존재하지 않는듯한 영화다. 빛과 색의 추억만이 남는다.

둘째, <엠>은 "정치적으로 올바름"이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적절함"이라는 기준으로 바라볼 때는 사실,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추세는 최근의 많은 한국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경향중의 하나인데-물론, 그렇지 않은 영화도 있다- 영화에서 현실감은 증발하고 영화는 2시간짜리 백일몽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왜 모든 영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적절해야 한지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거기에 답을 한다면, 영화란 많은 영화이론가들이 지적하듯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도구이며, 주류 이데올로기로 관객을 포섭하고, 자본주의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을 창조하기도 하기때문이다.

미국이나 한국을 비롯한 대다수의 국가체제가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므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인 이론가들은 나름대로 많은 영화를 비판하면서 좋은 영화와 작가들을 식별하여 왔다. 그리고, 최근의 국내영화는 당대의 주류이데올로기,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일정정도식 반영을 함으로써 비판과 찬향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데, 한국영화의 어느시점에서인가부터 특이한 영화경향이 하나 등장하고 있다. <엠>도 그 사례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특징적인 점은 영화자체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무화되어있고, 또한 관객을 정치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무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영화들은 영화에 직간접적으로 반영되는 역사와 사회상이 다 탈각되고, 탈역사화와 탈사회와의 애매모호한 공간들을 창출한다.

어떤 영화에서는 그런 공간이 최신유행의 게임이나 가상공간으로 창조되기도 한다. <엠>은 조금 다른 영화적 무대와 공간을 가지고 있는데, 마치 1990년대에 국내에서 개봉되었던 코헨형제들의 영화들을 언뜻언뜻 상기시킨다.

<엠>에서는 영화의 외형(영상)이 내부(의미)를 전복시키고 있다. 그 전복된 영화에서 관객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자로 재구성이 된다. 이런 점은 최근 몇년간 한국영화들이 광고적 영상기법이나 제작기법을 을 많이 따라간다는 점에서도 볼 수 있고, 실증적으로는 PPL기법과 같은 기법들이 영화내부에서 많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2007년 현재, 과거같은 동서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없지만, 사회의 다양한 층위에서 다채로운 빛깔로 소소한 전선이 수도 없이 그어진다. <엠>은 통념적인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는 철저하게 탈정치화, 탈이데올로기화된 영화다. 즉, 거대서사에서는 독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경제재로서의 영화로 돌아가서, 영화산업도 산업이고, 영화도 문화상품이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이명세 감독의 <엠>도 자본주의적 상품이데올로기에만은 포섭이 된다.

이명세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탈정치적, 탈이데올로기적으로 만들려고 의도했는지, 혹은 결과치만이 의도와는 달리 그렇게 나왔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상품이데올로기의 문법을 따르는 영화는 결국 이데올로기적일수 밖에 없고, 어떤 영화도 이데올로기적 비판에서 제외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리고, 이명세의 <엠>은 정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는 비판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 상품이데올로기에 궁극적으로 포섭이 되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단 한마디의 비판도 없이 묵시적 동의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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