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주름잡던 ‘조폭’ 가문의 쇠락
“조폭 주인공인 영화 내년엔 없을 것”
영화적 공간·캐릭터 넓히며 시대를 풍미
‘조폭 같은 한국사회’ 비추고 뒤안길로
영화적 공간·캐릭터 넓히며 시대를 풍미
‘조폭 같은 한국사회’ 비추고 뒤안길로
2000년대 한국영화계를 주름잡은 장르는 단연 조폭영화다. 조폭영화는 코미디와 액션, 멜로와 액션, 소시민과 폭력배 캐릭터의 결합 등 장르와 소재를 가로질러 이어가며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조폭영화의 인기는 “유행 장르는 길어야 5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영화시장의 법칙도 깨며 무려 10여년 동안 인기를 누려왔다. 폭력 미화 등의 논란을 낳았지만 조폭영화는 흥행을 주도하며 한국영화가 안정적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톡톡히 한몫 했다.
그러나 이처럼 장수해온 조폭영화도 올해 끝물을 만난 듯하다. 자기 복제의 덫에 걸린 조폭영화는 ‘값싼 영화의 대명사’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올해 들어 급격히 흥행력을 잃었다. 현재로서는 기획되는 조폭영화 자체가 거의 없는 실정이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폭영화 전성기는 이제 일단락될 것으로 보인다.
■ 저무는 조폭= ‘조폭 마누라 시리즈’ ‘가문 시리즈’ ‘두사부 시리즈’ 등 2001년께부터 매년 명절마다 선보였던 조폭코미디 대표 시리즈 3개가 올해로 막을 내린다. ‘조폭마누라’는 2001년 1편 530만명, 2편(2003년) 190만명, 3편(2006년) 180만명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두사부일체>(2001년·340만명)도 지난해 2편 <투사부일체>가 600만명을 끌었지만 올해 <상사부일체>는 한가위 대목에 개봉하고도 100만명에 그쳤다. 가장 흥행 성적이 좋았던 가문 시리즈의 경우 1편 <가문의 영광>(2002년·520만명), 2편 <가문의 위기>(2005년·564만명)에 견줘 지난해 3편 <가문의 부활>(350만명)의 흥행 성적이 떨어졌다. 가문시리즈 제작사인 태원엔터테인먼트 정태원 대표는 “가문 이름을 건 영화는 더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코미디 뿐만 아니라 <친구>의 계보를 잇는 무거운 조폭물 <비열한 거리> <열혈남아> <해바라기> 등도 흥행면에선 빛을 크게 못 봤다. 이런 흐름을 반영하듯 현재 기획 중인 영화들 사이에서 조폭을 소재로 한 작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 조폭의 등장= 2000년대 조폭영화는 한마디로 절대강자였다. 2001년은 그 절정이었다. <친구> <신라의 달밤> <조폭마누라>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 등이 나와 그 해 흥행순위 10위 가운데 6편이 조폭 영화였다. 산업적으로 조폭영화는 한국영화의 점유율을 높여준 일등공신이었다. 2001년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은 전해 30%에서 47%까지 뛰어올랐다.
물론 영화에 ‘조폭’이 등장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 <장군의 아들>이나 1970년대 활극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러나 이 시기 조폭은 액션을 집어 넣기 위한 배경을 넘지 않았다. 2000년대 본격 등장한 조폭영화들은 조폭의 조직 논리나 문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조폭이 한국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비유로 각광받은 것이다. 영화 속 조폭들은 조직적으로 부동산 개발 등 산업 사회의 이권 다툼에 뛰어들었고 한국의 주류 사회로 침투했다.
1997년 화제가 되었던 <넘버 3>는 이런 특징들을 담고 있으면서 조폭이 동시에 여러 장르로 변주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조폭 영화의 신호탄이 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조직 2인자 자리를 놓고 태주(한석규)와 재철(박상면)이 벌이는 경쟁 구도는 이후 여러 조폭영화에서 반복된다. 두목 아래 ‘덜 무식한’ 조폭과 ‘더 무식한’ 조폭을 경쟁하게 해 희화하는 방식이다. 이런 희화화는 사자성어만 나오면 말을 더듬는 조필(송강호)로 극대화됐다.
■ 조폭의 진화= 바보 같은 조폭 캐릭터를 축으로 삼아 액션과 코미디를 결합한 조폭영화들은 공간과 캐릭터를 넓혀갔다. 조폭코미디의 원조로 꼽히는 <조폭마누라>는 두목을 여성으로 바꿨다. 조폭을 학교로(<두사부일체>), 절로(<달마야 놀자>), 기업으로(<상사부일체>) 보냈고 모범생과 조폭의 역할을 바꿨다. <신라의 달밤> <두사부일체> 등을 기획한 두손시네마 서정 이사는 “코미디의 기본은 문화 충돌인데 이를 살리기에 조폭은 적당한 소재였다”고 말했다. 실상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조폭 생활에 소시민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은 코미디의 핵심인 의외성을 얻는 데 효과적이었다. 정태원 대표는 “우울증에 걸린 조폭이 나오는 <애널라이즈 댓>를 보니 보통 사람을 풍자하는 것보다 훨씬 웃겼다”며 대표적인 인기 브랜드 <가문>시리즈가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가문>시리즈는 영리하게도 이런 의외의 상황에 가장 강력한 정서인 가족애를 버무렸다. 여동생의 행복과 가문의 번영을 위해 웃기는 음모를 꾸미는 조폭, 홀로 아이들을 키우느라 거칠어진 어머니 조폭 등을 내세워 가장 폭력적인 장르를 되레 명절용 가족 장르로 바꿔버렸다.
조폭영화의 또 다른 한 축은 비장한 멜로 드라마와 결합하는 것이었다. 1994년 <게임의 법칙>부터 이런 특징이 드러나는데, 기념비를 세운 것은 남자들의 눈물을 보여줘 2001년 818만명을 끌어들인 <친구>다. <친구>는 주인공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조폭이 돼 내적 갈등을 경험하는 미국의 갱스터 영화와는 달랐다. 주인공은 진흙탕 같은 조폭 사회에 개인적 배경 등의 이유로 발목 잡혔지만 순수한 감정인 우정 한 자락을 지키려 노력한다.
이런 진흙탕 현실과 사랑, 우정 등 순수한 이상을 조합해 비장미를 이끌어내는 방식은 이후 <파이란> <달콤한 인생> <비열한 거리> <열혈남아> <해바라기>로 이어진다. 느와르의 팜므 파탈(주인공을 파괴하는 매혹적인 못된 여성) 자리는 순수한 어머니, 누이, 연인으로 대치됐다. 김지미 영화평론가는 잡지 <씨네21>의 기고에서 “<친구> <파이란>에서 보이는 남성들 사이 끈끈한 무엇, 변두리의 정서, 남성을 일깨우는 여성의 존재는 이후 수없이 복제됐다”며 “조직에 몸담고 살아왔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자기 연민과 합리화가 깔려있다”고 설명했다. 올 초에 나온 <우아한 세계>는 자녀 학비를 버는 가장 조폭을 내세워 조직 질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비애감과 의외의 상황이 주는 웃음을 결합했다.
■ 인기의 배경= 조폭영화가 인기를 끈 데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여러 장르들을 포섭해가는 영리한 전략 이외에 시대의 정서도 한몫했다. 유지나 동국대 교수(영화영상학과)는 “조폭은 남자다움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라며 “1997년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뒤 가부장제 권력 위축에 대한 반작용과 향수”라고 조폭영화의 유행을 분석했다. 조폭 영화의 흥행에서 한국 사회의 만연한 군대 문화를 보는 시각도 있다. 조폭 사회의 극단적 상명하달식 논리와 유머는 군대 문화와 닮았다. 김경욱 영화평론가는 책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 영화의 나르시시즘>에서 “한국의 조폭영화는 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폭력의 일상화와 내면화된 군대 문화 사이에 태어난 것”이라며 “거기에는 파시즘에 대한 은밀한 욕망이 담겨있다”고 비판했다.
조폭영화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 변모해 버린 한국 사회의 단면을 드러냈다. 흥행작들에서 조폭은 제도권인 학교 등에 진출해 되레 합법적인 공간이 더 조폭같다고 폭로한다. 조폭영화들에게 공권력은 없거나 무기력하다. 이렇게 조폭영화는 패거리주의 등 한국 사회의 작동 원리를 은유하는 동시에 제도권을 부수는 통쾌함을 관객에게 안겨줬다. 또 <친구>류의 비장한 조폭물에서 관객들은 주변부 인물인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진흙탕 속에 뒹굴며 살 수 밖에 없는 주인공의 자기 연민과 합리화에 공감했다.
조폭영화는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비판을 항상 달고 다녔다. 김경욱 평론가는 “조폭의 자기 성찰은 생략하고 세상에는 좋은 조폭과 나쁜 조폭이 있다는 부조리한 이분법을 만들었다”고 책에서 설명했다. 그러나 조폭영화의 매력을 갉아먹은 것은 외부의 비판보다 장르의 자기 복제였다. 조폭이란 장르가 장사가 되면서 비슷한 기획들이 쏟아지면서 값싼 기획 영화라는 이미지만 굳혀갔다.
■ 조폭의 미래= 조폭은 비일상적이며 액션을 담을 수 있는 매력을 지녔기에 주춤하더라도 사라지지는 않을 듯하다. 가문 시리즈의 정태원 대표는 조폭코미디가 지난 ‘문화 충돌’ 요소에 주목한다. 문화 충돌은 미국 시장에서도 받아들이기 쉬운 흥행 코드라는 것이다. 그는 미국 시장에 선보일 두 세 가지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는데 하나는 <가문의 영광>의 미국 버전 정도다. 흑인 갱단이 기른 한국 여자가 어느 날 백인 남자와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게 되고 두 집안 사이에 웃기는 갈등이 벌어진다. 다른 하나는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이탈리아 갱단과 중국 갱단의 대결을 코믹하게 풀어가며 로맨스를 보태는 것이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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