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지난 8일 개봉한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로스트 라이언즈>를 보러 극장에 갔다가 ‘벙쪄서’ 나온 관객들이 얼마나 많을까. 한 번 포스터를 보라. 로버트 레드포드, 메릴 스트립, 톰 크루즈가 주연했고 제목이 <로스트 라이언즈>(원제 <라이언스 포 램스(Lions for Lambs)>)인 영화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뭘까? 정치 세계나 법률 세계를 다룬 진지한 스릴러나 법정물 정도가 아닐까? <어 퓨 굿맨> 정도의 수준으로 만들어져 아카데미상의 문을 두드려도 될 법한 그런 영화 말이다. 적어도 사람들은 저 이름들을 통해 그런 영화들을 기대하고 그것은 일종의 약속이다.
하지만 <로스트 라이언즈>는 전혀 엉뚱한 걸 보여준다. 이 영화에는 드라마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인터뷰나 학생면담이라는 기초적인 극적 설정만 제공될 뿐, 나머지는 몽땅 할리우드 스타들의 입을 빌린 정치 연설이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아프간 참전군인의 이야기들이 그나마 드라마와 액션을 제공해주긴 하는데, 그들은 딱하게도 앞뒤에 놓인 인터뷰와 학생면담의 인질들이라 끝까지 온전한 생명력을 찾지 못한다.
레드포드의 의도까지 나무랄 수는 없다. 양심적인 ‘할리우드 리버럴’답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매체를 통해 세상에 뭔가 올바른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그가 이런 걸 처음 한 것도 아니고 부시 정권의 대외정책을 비판한 첫 번째 할리우드 영화도 아니다. 문제는 보다 간단한 것이다. <로스트 라이언즈>는 재미가 없다. 로버트 레드포드 나오는 영화를 보려고 극장에 온 사람들은 로버트 레드포드 교수 앞에 1시간 반 동안 잡혀 설교를 들으려 오는 게 아니다. 당연히 그의 설교는 먹히지 않는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끼는 건 지금 정치적 각성이 아니라 레드포드의 오만함에 대한 거부감이다. 하긴 이 영화는 척 봐도 기부행사 같다. 잘 나가는 할리우드 배우들이 모여 며칠을 투자해 만든 비디오.
아무래도 레드포드는 너무 오만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소리를 했다고 해서 모두가 그 말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 이야기에 설득력을 넣어주는 것이 진짜 해야 할 일인데, 거기엔 여러 방법이 있고, 할리우드 사람들이 그 중 가장 잘하는 건 드라마에 메시지를 섞어 버무리는 것이다. 이런 영화들을 ‘뻔뻔스러운 아카데미표 영화’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그런 영화들을 보고 움직인다. 광대가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다면 어릿광대짓을 통해 해야 하고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적어도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입을 빌어 1시간 반 동안 설교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나쁜 일이다.
영화를 보다보니 <설리번의 여행>이 생각난다. 메시지 있는 사회 영화를 만들겠다며 폼잡고 다니다가 밑바닥에서 엄청 고생을 한 뒤 다시 본연의 코미디 영화로 돌아가는 감독 이야기 말이다. 설리번의 선택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세상을 위해 가장 큰 도움이 되는지 알고 있었다.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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