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래된 정원’
임상수 감독, <오래된 정원> 리뷰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었다. 아니 그것은 감독의 탁월함이기 이전에 원작을 쓴 황석영 작가의 탁월함이었을 것이다. <삼포로 가는 길>에서 <무기의 그늘>에서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반드시 되짚어보아야 할 사회적 의미들을 언제나 화두로 던져주었던 그가 <오래된 정원>에서 던진 것은 ‘그 시대에도 사랑이 가능했던가?’라는 물음이었다. 그 물음을 임상수 감독은 탁월한 연출력으로 필름에 담아내었다.
80년 광주의 봄, 그 한복판에서 사회주의자로 살았던 현우(지진희). 수배자가 된 그는 수배령을 피해 잠수를 하게 되면서 윤희(염정아)를 만난다. 미술 교사로 시대적 저항운동을 비껴 살고자 했던 윤희는 현우를 숨겨주어야 할 상황만큼은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 결국 현우와의 운명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는지, 아니면 어긋난 운명이었는지 작가나 감독은 얘기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안다. 그것은 숙명이었고, 또 그렇게 어긋난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6개월 동안의 도피 생활 속에서 현우와 윤희의 사랑은 깊어진다. 그리고 그 사랑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의 어긋난 운명은 그 본질을 드러낸다. 주변의 모든 동료들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현우는 이 영화가 던져주고자 했던 그 분명한 메시지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 시대에도 사랑이 가능하단 말인가?” “동료들이 다 잡혀갔는데 사랑을 위해 저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계속 숨어서 지내야만 하는가?”
처절했던 현실을 비껴서 살고 싶었던 윤희는 사랑을 위해 함께 숨어 지내자고 호소한다. 그러나 사랑이 아무리 절대적이라지만 그 사랑보다 더 큰 책임감 앞에서 현우는 윤희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묻는다. 사랑보다 더 큰 책임이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아이를 가진 한 여인과 그 삶을 위해 사회적 대의 명분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혁명은 짧고 역사는 긴데 그 역사의 또 다른 순간을 위해서 지금은 사랑을 선택해도 되지 않는가? 시대를 잠깐 비껴간다고 해서 역사적 소임과 역할이 다 사라졌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 무겁지만 엄중한 질문을 독자들과 관객들에게 쏟아내는 작품이 바로 <오래된 정원>이다. 이 엄중한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적어도 격동의 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 엄중한 질문앞에 비교적 담담하게 답했던 것 같다. 작가도 그렇게 말한 것처럼 그 시대 사회 운동의 한 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은 엄중한 사회적 책임 앞에 사랑을 희생하면서 살았다. 이데올로기의 현실 앞에서 사랑은 다소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사랑을 노래하는 것조차도 사치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서정시를 쓰는 것조차도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80년대 후반,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시인이 섬진강에 대한 자연의 서정을 노래할 때 사람들은 그렇게 비난했다. 이 시대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 하고 말이다. 이데올로기적 서사시와 사상시에 몰입했던 그 시대의 아픔이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로 그것을 <오래된 정원>은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사랑보다 더 큰 책임을 따라 윤희의 곁을 떠난 현우는 서울로 올라가 체포되고 만다. 그렇게 잡혀서 간첩혐의로 무기징역을 언도받게 된 현우. 그의 딸을 낳고 기르면서 오래된 사랑을 간직한 채 아픈 현실을 살아가는 윤희. 그들의 간절한 사랑은 당시의 정치적 폭도들에 의해서 처참하게 짓밟히고 결국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마음속으로만 사랑의 그리움을 삼킨다. 여기서 작가는 누가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갈라놓았는가를 묻는다. 그럴 자격이나 권위를 누가 저들에게 부여했던가? 자신들의 탐욕스러운 욕망이 순수한 젊은이들의 사랑을 저토록 처참하게 밟아놓았다는 사실을 그 때의 정치가들이 지금쯤은 알고 있을까? 혹시 그들이 이 영화를 보았다면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참회했을까?
현우가 감옥에서 절망적 고통을 겪고 있는 그 오랜 기간 동안에 윤희는 감옥 밖에서 존재감의 소멸을 경험해야 했다. 사람들은 대게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임상수 감독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감옥에서의 현우보다 감옥 밖에서의 윤희의 삶을 더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감옥에서의 삶을 영상에 담기가 힘들어서 그렇게 했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감독은 분명히 감옥 밖에서의 윤희의 삶을 통해 무언가 말하고자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은가? 바로 감옥 안에서의 삶보다도 오히려 감옥 밖에서의 삶이 더 처절한 것이었다고 말하려고 한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현우는 17년간의 감옥생활을 견디고 살아나오지만 윤희는 그 기간 동안 서서히 육체의 고통 속으로 침잠해 결국 죽고 만다. 감옥에서의 생활이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갖게 해주는 반면, 감옥 밖에서의 생활은 점점 더 존재의 소멸로 이끌려간다. 간절한 사랑의 욕망을 체념하고 살아야 하는 윤희의 삶을 결국 자신의 생명력을 점점 상실해가는 삶이었다. 시간이 흘러 얼굴도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사랑을 향한 그리움은 더욱 더 절실해지다보니 그 고통의 시간을 잊기 위해서 윤희는 결국 자신의 생명력을 소진시키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토록 비참하게 갈라놓은 행위의 처참함을 정치가들은 알고 있을까?
한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은 오로지 정치적 야망으로 가득 찬 군부의 발아래 무참히 짓밟혔다. 그 상처를 싸매줄 사람은 함께 그 고난에 처해있는 사람들뿐이다. 영작(윤희석)이 분신한 미경(김유리)을 잃고 슬픔 중에 있을 때 그를 자신의 품에 감싸준 윤희의 행동이 그걸 형상화해 준다. 인권변호사였던 영작도 결국엔 사회적 명분과 책임을 피하지 않고 그 엄중한 요구를 향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시대의 진지했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그 숭고한 선택의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투쟁의 터널을 지나 민주화의 시대로 들어선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다시 묻는다면 현우와 같은 선택은 어리석은 것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윤희의 말대로 긴 역사 속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을텐데 굳이 짧은 혁명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그렇게 가치가 변했다고 해서 80년대 우리 사회가 사랑을 포기하고 사회적 책임을 완수하고자 했던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엄중한 선택에 대해서 여전히 박수를 보내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17년 만에 출옥한 현우는 너무나도 많이 변해버린 사회를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낡은 버스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시대에 감옥에 들어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가용과 핸드폰을 사용하고 수백만원짜리 옷을 입는 시대에 나왔으니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차라리 감옥이 그에게는 더 편한 세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감옥 밖이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감옥 안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그의 <오래된 정원>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17년 동안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던 윤희와의 사랑의 기억을 묻어둔 곳, 바로 그 오래된 정원을 가야했기 때문이다.
윤희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현우의 의식 속에서는 결코 떠나지 않았다. 오래된 정원에서 그는 17년의 역사를 다시 불러내어 지나간 역사와 자신의 의식을 일치시킨다. 그렇게 해서 현우와 윤희와의 사랑은 다시 시작된다. 객관적으로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났지만 현우의 마음 속에서 윤희를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래된 정원에서 그녀와의 사랑의 기억들이 현실이 된다. 과연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적이다. 아니 우리의 의식은 그런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모든 것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고 소멸시켜 버리는 우리의 천박한 의식이 문제가 아닐까? 현우와 윤희는 17년 전처럼 17년 후에 다시 의식 속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그것만큼은 그 누구도 침탈해 갈 수 없다. 그 어떤 독재자가 나타나도 빼앗을 수 없다. 그래서 다행이다. <오래된 정원>까지 빼앗아갈 수 있는 세력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오래된 정원이 있다. 바로 자신의 딸, 은결(이은성)이다. 엄마를 닮아 예쁘고, 자신을 닮아 약간 검은 피부를 가진 고등학생이 된 딸 은결. 그녀에게서 현우와 윤희의 사랑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은결을 만나면서 현우는 윤희의 채취를 느낀다. 그녀가 자기 곁을 지나갔다는 채취를 말이다. 현우와 윤희의 사랑의 채취가 남아 있는 은결은 결국 그들의 오래된 정원이었던 것이다.
자! 이제 다시 원래의 화두로 돌아가 보자. 사회적 책임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사회의 80년대에도 정원은 있었는가? 이쯤에서 관객들은 분명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 시대가 아무리 처절하고 엄숙한 시대였을지라도 누구에게나 한 번쯤 로망이 있었고, 서정이 있었다. 시국과 이데올로기로 점철되어 개인적이고 사적인 가치들이 유보되던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완전히 제거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 사적인 삶의 시점에서 로망과 서정이 있던 공간을 우리는 <오래된 정원>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도에 현우와 윤희가 6개월 동안 함께했던 갈뫼와 같은 그곳 말이다.
<오래된 정원>이 깊이 있는 영화인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정원>을 생각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 당시의 사회적 화두를 알지 못했던 요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개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래된 것일수록 가치가 있고 신비감이 있는 것이다. <오래된 정원>은 그 신비로운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영화였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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