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지난해 나온 한국 영화들을 검토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건 지난해 한국 영화에서 어린이 캐릭터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한 번 직접 보시라. <그놈 목소리>, <밀양>에서 아이들은 유괴당하고 살해당한다. <눈부신 날에>와 <마을금고 연쇄습격사건>에서 아이들은 중병에 걸렸다. <날아라 허동구>의 주인공은 정신지체다. <검은 집>과 <헨젤과 그레텔>에서 아이들은 학대당하고 살해당한다. <열한번째 엄마>의 어린이 주인공도 아버지에게 학대당한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아이들은 버려진다. <극락도 살인사건>과 <두 사람이다>에서도 아이들은 살해대상이다. 애니메이션 영화인 <천년여우 여우비>나 실질적으로 미국 영화인 <방황의 날들>, 인디영화인 <열세번째 수아>에 출연한 주인공들이 간신히 탈출한 셈이다. 그것도 자기희생 취미가 있는 비극적 주인공 여우비의 운명을 보다 낙관적으로 해석한다면 말이다. 올해는 나은가? 설마. 1월 개봉작인 <어린 왕자>부터 불치병에 걸린 어린 소년이 등장하는데?
아이들이 고통 받는 내용의 이야기를 쓰는 게 나쁜가? 그건 아니다. 실제 세계에서 아이들이 고통 받는다면 당연히 그 이야기는 소재가 되어야 한다. 나 역시 지난해에 만만치 않은 어린이 학대극을 하나 쓴 적 있으니 이야기 쓰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한다면 자기변명할 기회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비중은 비정상적이다. 한 명의 작가가 아이들의 고통을 다룬 이야기를 쓴다면 그건 받아들일만 하지만 그게 아니지 않나. 한국 시나리오 작가들은 학대와 고통을 주는 걸 빼면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텔레비전은 좀 낫지 않냐고? 그건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역이 대부분 성인 주인공의 ‘아역’이기 때문이다. 시트콤이 아닌 장르에서 독자적인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역은 에이즈에 걸린다.
고통받는 아이들이 극적효과가 좋다는 것 말고 이 집중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 있을까? 하나 있다. 다시 한 번 위의 리스트를 보시라. 학대극에서 탈출한 아이들은 대부분 주인공이고 스토리의 주체다. 하지만 고통 받고 죽어간 아이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 성인 주인공들을 고문하거나 구원해주기 위한 도구적 존재들이다. 이 영화들에서 아이들은 모두 타자로서 고통받는다. 다시 말해, 이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타자’에 정상적으로 감정이입하는 능력이 심하게 떨어진다는 걸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에 불과하다. 옛날 같았다면 이 자폭 캐릭터들은 대부분 여성 캐릭터들에게 돌아갔다. 여성 관객들의 힘이 세진 지금은 아이들에게 그 역할이 돌아간 것이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편견에 찬 습관은 그대로 남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싸워줄 대변인이 없기 때문에.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