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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영화제목 ‘베끼기’ 해도 너무해

등록 2008-01-13 21:13

저공비행
저번 주에 이어, 이번에도 리스트를 한 번 뽑아보자. 다음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개봉하거나 개봉 예정인 한국 영화들의 제목들인데, 뭔가 이상한 것이 안 느껴지는가?

<헨젤과 그레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뜨거운 것이 좋아>, <무방비도시>. <어린 왕자>. <더 게임>,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원스 어폰 어 타임>, <라듸오 데이즈>. <6년째 연애중>.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그건 정말 큰일이다. 한국 영화계의 정말로 괴상한 병적 현상에 벌써 둔감해졌다는 것이니까. 그 현상이란 남의 영화의 제목을 공공연하게 훔쳐 그 명성에 무임승차하는 버릇을 말한다. 가끔 하나씩 이런 영화들이 나올 때만 해도 짜증이 났는데, 요샌 암만 생각해도 그 정도를 넘어섰다. <한겨레>(2007년 11월5일치)에서 한번 이 문제를 지적했는데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

한 번 확인해볼까? <헨젤과 그레텔>, <뜨거운 것이 좋아>, <무방비 도시>, <어린 왕자>, <더 게임>, <라듸오 데이즈>는 몽땅 복사한 제목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니지만 윌리엄 와일러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와 유사점을 피해갈 수 없고,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세르지오 레오네 이후 에픽 영화의 제목에 거의 습관적으로 붙는 표현이며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는 영화 사상 가장 유명한 수퍼 영웅의 이름이 붙는다. 여기서 그나마 오리지널처럼 보이는 제목은 단 하나 <6년째 연애중> 뿐이다.

남의 제목을 훔쳐 쓰는 것이 당연한 습관처럼 여겨지는 것도 괴상한데 산사태라도 일으킨 것처럼 이런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현상을 도대체 뭐라고 이해해야 할까? 게다가 이 습관에는 별다른 근거도 없다. 익숙한 제목으로 관객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킨다고 핑계를 대는데, 카피 제목 영화들이 흥행에 더 낫다는 구체적인 통계 자료라도 있는 건지? 괜히 관객들 검색만 귀찮게 만들고 영화 데이터베이스를 오염시킬 뿐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를 검색하러 들어온 데이터베이스 사용자들 중 몇 명은 순전히 검색 실수로 이상기의 <무방비 도시>에 걸려 넘어져 괜한 시간을 낭비할 텐데, 그런다고 과연 이 영화의 평판에 무슨 도움이 될까?

이것 한 가지만 확실히 하자. 제목은 일회용이 아니다. 여러분이 제목을 붙이면 그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영원히 역사에 남고 데이터베이스의 일부가 되며, 두고두고 남아 후대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매료시킨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부분 후자다. 예를 들어 비디오 시대를 지나온 우리나라 영화광들은 수입회사가 붙인 말도 안 되는 제목 때문에 애먹은 경험담을 수없이 들려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이 우리나라에서 어떤 제목으로 불렸더라?) 카피 제목도 마찬가지다. 당신들이 어떤 미신적 사고방식으로 카피 제목의 실효성을 믿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우리한테서 데이터베이스를 물려받아 꾸려가야 할 후손들이 당신들 때문에 겪어야 할 고생과 망신을 잊지 말자.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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