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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굿바이 마이 ‘렌프로’

등록 2008-01-20 21:34

저공비행
내가 본격적으로 영화 칼럼을 쓰기 전의 일인데, 하이텔의 영화 게시판에서 배우들의 별점 평가를 시리즈로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아역 배우들만 따로 묶어 평가하는 게시물에서 막 <의뢰인>으로 데뷔한 브래드 렌프로에게 별을 넷을 주며 미래가 밝은 배우라고 평했다. 당시엔 그게 타당해 보였다. <의뢰인>에서 렌프로의 연기는 훌륭했다. 많은 남자 아역 배우들이 외모와 목소리가 바뀌는 십대를 넘어가며 망가지지만, 어차피 맥컬리 컬킨처럼 화사한 외모를 과시하는 부류가 아니었으니 그 정도면 그 시기를 쉽게 통과할 수 있을 법했다. 내가 기대했던 그의 미래는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처럼 일급 스타는 아니더라도 중저예산의 진지한 영화들에 출연하며 꾸준한 경력을 이어가는 전문 배우의 모습이었다.

나는 얼마나 맞았나? 21세기가 되기 전까지 그의 경력은 꽤 좋았다. <의뢰인>의 뒤를 이은 영화는 <허클베리 핀>의 각색물인 <톰과 허크>와 에이즈를 다룬 멜로드라마 <큐어>였는데, 후자는 <굿바이 마이 프렌드>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꽤 인기를 끌었고 그의 사망 기사엔 대부분 <굿바이 마이 프렌드>의 배우라는 딱지가 붙는다. 98년에 나온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은 그렇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렌프로가 이언 맥컬렌 경과 일대일로 연기 대결을 해도 충분히 먹힐 만한 배우라는 걸 증명했다. 그에겐 재능이 있었다. 그 정도면 화려할 정도는 아니어도 외모도 괜찮았고. 그냥 자기 관리만 충분히 하고 욕심 없이 앞에 주어진 계단만 올라도 앞날이 보장된 배우였다.

정말 그렇게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들 아시겠지만, 그에게는 더는 미래가 없다. 렌프로는 15일에 죽었다. 지금 인터넷에서 새 소식이 나왔나 보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사인이 발표되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스물다섯 살의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갑자기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면 그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거다. 그리고 그 책임은 십중팔구 당사자가 져야 할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렌프로는 할리우드에서 망가진 젊은 아이들의 전형적인 경로를 따랐다. 그는 마약 소지 혐의로 수차례 체포되었고 미성년 음주 위반에 걸려 재활 명령을 받았으며 요트 절도 혐의로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처음 체포된 게 98년이니, 이건 할리우드가 불쌍한 아역 배우의 경력을 망쳐서라는 핑계를 댈 수도 없다. 그는 그냥 어리석은 길을 따른 것뿐이다.

결국 내가 틀렸다. 충분한 재능과 기회가 있어도 그걸 스스로 작정하고 망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살아 있는 우리로서는 형편없이 짧아진 그의 필모그래피를 바라보며 애도의 뜻을 표시할 수밖에. 그것은 나름대로 감동적이고 서글픈 경험일 수 있겠지만, 렌프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죽은 자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남의 어리석음에서 교훈과 이익을 얻는 건 언제나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제발 많기를 빌자.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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