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상원의원으로 지명된, 세상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지역 보이스카웃 단장 ‘제퍼슨 스미스(제임스 스튜어트)‘ ⓒ 콜롬비아 영화사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그가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임기 중에 사망한 지역의 상원의원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해진 지역 유지들의 순간적이면서도 정략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었던 셈이니까. 그것도 주지사의 집 저녁식사 시간에 자녀들의 아우성과 그 순간 영악하게 돌아간 주지사의 정치적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제퍼슨 스미스'는 지역의 보이스카웃 단장이었다. 어린 아이들과 노는 녀석이다. 어린 아이들과 다람쥐나 잡겠다고 나서는 녀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정치적 꼭두각시로 이런 녀석도 드물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퍼슨 스미스는 순식간에 연방 상원의원이 돼서, 워싱턴으로 진출한다.
그의 성이 '스미스'라는 것이 재미있다.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스미스'는 너무 흔한 이름인 나머지 미국인의 일반명사로도 통하는 일면이 있다. 배역을 맡은 제임스 스튜어트는 누구일까? 주로 '착하고 평범한' 배역을 주로 맡으면서, 서민적 이미지를 구축해 미국인과 영화팬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는 배우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은 '제퍼슨 스미스'라는 캐릭터에 대해 전형적이면서도 훌륭한 선택을 한 것이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속에서 엿보이는 제임스 스튜어트는 실제로도 너무 착한 나머지, 어리숙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가 사는 지역에 있는 계곡에, 그를 상원의원으로 이끈 협잡꾼들은 댐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 댐 건설에는 이 협잡꾼들의 검은 이권들이 몽땅 달려있는 곳, 하지만 스미스 상원의원은 아이들을 위한 야영장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는, 그렇듯 정치와 사회의 온갖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있는 협잡꾼들에 맞서 싸우는 '평범한 시민' 스미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영화에서의 명장면은 역시나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스미스의 연설 장면. "발언권을 양보하지 않는 한 계속 발언할 수 있다"는 국회발언권을 이용해 무려 24시간에 걸친 연설을 감행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롯되는 협잡꾼들의 언론 플레이와 그에 굴하지 않고 '미국적 가치'와 '상식'을 지키려는 스미스 상원의원의 온 몸을 던진 24시간 연설이 미국 관객들에게 인상을 남겼을 터. 이후에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와 인상적인 결말을 만드는 클로드 레인스가 맡는 '조셉 페인 상원의원'의 '막판 활약'도 스미스 상원의원의 24시간 연설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기술적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을 터.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음향 효과다. 스미스 상원의원의 연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가운데, 그 주변부의 음향은 '웅성웅성거리는' 소음으로 처리해버렸다. 당시로서는 단호하고도 빠르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화면 편집도 일품이다. 물론, 이 영화는 특유의 '미국식 애국주의'나 막판 반전이 다소 감상적이라 훗날에는 비판받았지만, 사실 미국인이 미국에 대한 애국을 주장하는 것 자체만을 지탄할 수는 없는 법.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정도면 크게 탓할만한 노골적인 메시지는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듯하다. 중요한 것은, 무려 근 70년 전에 제작된 이 영화가 제공하는 이야기다.
'월워크 계곡의 댐 건설'과 '경부대운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에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월워크 계곡의 댐 건설'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댐 건설'에는 지역 협잡꾼들의 이득이 달려 있다. 그들의 지원을 받는 조셉 페인 상원의원이 '댐 건설' 법안을 강도높게 추진하려는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라고 상원의원으로 뽑아놓은 녀석이, 보이스카웃 단장 주제에 이 법안을 뒤집어버리려 하니 열받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스미스 상원의원은, 이곳에 자연친화적인 야영지를 건설하려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24시간 연설'에서도 그는 이렇게 일갈한다.
"여기 계신 의원님들도 모두 소년 시절을 보내셨겠죠? 소년 시절엔 누구나 1년에 한두 달쯤은 숨 막히는 도시의 혼잡에서 벗어나, 오묘한 자연의 품에 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나라, 혹은 어느 계층 출신이든 어린이들은 순수합니다. 그 순수한 가슴에,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안겨줘야 합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넓고도 큰 자연의 아름다움은 결코 교과서 안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미스 상원의원은 이 발언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방청객들의 박수를 받는다. 그런데 70년 전의 스미스 상원의원의 말 한마디가 새삼 와닿는다는 것이 느껴지지는 않으시던가? 그렇다. 이 발언을 특히나 들려줘야 할 사람이 있다. 누굴까? 바로 '경부대운하'를 추진할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그를 따르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다.
시사주간지 <한겨레21> 693호 기사 <불굴의 의지인가, 정치적 계산인가>에 따르면, 이명박 당선인은 20여 년 전부터 '경부대운하'를 발상했으며,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에게도 공약 검토를 제안하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거절당하던 그 순간의 이명박 당선인의 한 마디는 현실이 됐다. 뭐라고 했을까?
"괜찮다. 안 받아도 된다. 나중에 내가 써먹어야겠다."
이 말 한마디에 대통령직을 향한 그의 야심과, 그가 강도높게 밀어붙일 '경부대운하'에 대한 뚝심이 통째로 배어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로 무서운 한마디다.
"어린이의 순수한 가슴에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안겨줘야 한다. 헤아릴 수 없이 넓고도 큰 자연의 아름다움은 결코 교과서 안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스미스 상원의원의 한마디를 이명박 당선인에게 들려주면 그의 반응은 어떠할까?
쉽게 예상된다. 아마도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녀석"이라는 이야기나 안들으면 다행일 것이다. '영어 몰입 교육'을 강도높게 추진하겠다는 사람에게, '대자연의 아름다움'이나 '환경 파괴의 재앙' 따위의 지적은 해봐야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경부대운하'가 그의 확고한 신념인지, 아니면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에 등장하는 '댐 건설'에 이득이 걸린 이들과 같은 처지인 것인지, 그것은 이명박 당선인과 그의 측근들만이 아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경부대운하'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소수의 이득을 위해, 스미스 상원의원이 일갈했던 '대자연의 아름다움'은커녕 만에 하나라도 있을 홍수나 선박 사고 후 기름 유출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스미스씨를 음해하는 언론, 한국 수구언론과 닮았다
위의 이미지를 보시라. '댐 건설 법안'을 반대하며 '야영지 건설 법안'을 준비하는 스미스 상원의원을 음해하기로 작정한 언론의 1면 머릿기사다. 이 언론은 당연히, '댐 건설'을 지지하는 지역 협잡꾼들과 연계돼 있는 신문이다.
어떤가? 한국적인 현상이 엿보이지는 않는가? 그렇다. '댐 건설'을 지지하는 지역 협잡꾼들과 연계된 신문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를 보면, 이 언론들은 지역 협잡꾼들의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언론사 사주의 말 한마디에 위와 같은 톱기사를 뽑아올렸다. 이미지에서 거론된 언론 뿐만이 아니다. 어지간한 언론들이 다 스미스 상원의원을 음해하는 기사를 1면 머릿기사로 뽑아올린다.
그렇듯, 언론이 특정한 이득이 걸린 특정정치세력과 야합해 왜곡보도를 서슴없이 저지를 경우의 폐단을,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는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사심없이, 그저 미국인으로서의 가치에 맞게 상식적인 법안을 추구하려던 초보 정치인이, 단지 협잡꾼들이 추구하는 이득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난타를 당하는 것이다.
스미스 상원의원이 처음으로 등장해, 인터뷰를 시도하는 기자들에게 자연 사랑을 이야기하자 기자들 앞에서 온갖 동물 흉내를 다 냈던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사진으로 담은 언론사 기자들은 과연 어떤 기사를 작성했을까? 바로 이렇게 작성했다.
이런 요소조차도 닮았다는 사실이 기묘하다는 판단이 든다. 세상물정 모르는 스미스씨는 이런 기사를 담은 기자들을 한명한명 때리는 것으로 '복수'를 시도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세상물정을 모르기에 할 수 있었던 '순진한 방법'이다.
일명 '조중동'으로 묶이는 메이저언론 기자들을 향해 저런 식의 반응을 보이면, 그 당사자에 대한 기사는 앞으로 어떻게 작성될까? 물론, 우리 모두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홍길동씨, 여의도에 가다"
왜 '홍길동'일까? 관공서에 가보라. 서류 작성하는 법을 알려주는 안내문의 예시에는 '홍길동'이란 이름이 써져 있다는 것을 모두들 알 수 있을 것이다. '홍길동'은 그렇듯 은연중에 평범한 우리를 담는 이름이 돼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서민 '홍길동'씨가 국회의원이 됐다고 가정해보자. 세상물정 모르고 정치를 모르는 '홍길동 의원'이, 거대여당이 추진하는 '대운하' 법안에 대해 '자연 사랑' 따위의 명분으로 반대를 일삼았다고 생각해보자. 이 거대여당은 메이저 수구언론의 지원을 받고 있기까지 하다. '홍길동 의원'의 정치적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는 알게 모르게 희망을 이야기해놨다. 무엇이 희망일까? 스미스씨를 애초에 상원으로 추천한 이들은, 아직 세상의 떼가 덜 묻은 주지사의 어린 자녀들이다.
그뿐일까? 세상의 떼가 잔뜩 묻은 어른들의 '스미스 죽이기'에 대항하며 끝까지 스미스 상원의원을 지지한 이들도 어린이들이다. 그렇다. 이것도 미국적 가치라면 미국적 가치라 할 수 있지만, 나름대로는 인류 보편의 가치이기도 하다.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은 '어린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어린이들은 일찌감치 인성교육에 대한 의지가 없는, 그러면서 몰지각하기까지 한 일부 학부모들의 교육열에 노출돼 있다. 그 교육열을 이용해 '영어 몰입 교육' 등을 시도하려는 새 대통령도 취임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어린이들 앞에 '인성'이니 '자연사랑'이니 하는 세상의 근본을 이야기해봐야 과연 통할 수 있을까?
우리는 '홍길동씨'를 여의도에 진출시켜야 한다. 만약에 그가 '24시간 연설'을 준비하고 있다면, 기꺼이 환영해주자. 뿐만 아니라, 당신들의 자녀가 저런 '홍길동씨'를 응원한다면 그것 역시 기꺼이 환영해주자. 그런 당신의 아이들이라면, 날로 삭막해지는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영화 한번 봐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아는 아이들이, 세상에 찌들어 '댐 건설'을 환영하는 어른들에게 어떻게 대항하는지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어를 얼마나 유창하게 하며, 학교에서 몇등을 하느냐를 따지기에 앞서, 그렇듯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는 사고와 그 사고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아이들이 중요한 세상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서글픈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법이고 도덕성이고 다 필요없이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사고에 찌들고, 정작 그 대통령 당선인이 추진하려는 정책이 서민을 죽이려 드는 정책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우리 국민들이 과연 저런 이야기를 생각해볼 겨를이나 있을까? 혹시 '홍길동 의원'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철없는 놈'에 '세상물정 모르는 놈'이라고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일 것이다.
"경제만 살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당신, 당신이 말하는 그 '세상물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세상물정'을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교육시킬 자신은 있는가? 새해 첫날, 아이들을 훈계하기에 앞서, 당신 자신부터 이런 고민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은 '제퍼슨 스미스'라는 캐릭터에 대해 전형적이면서도 훌륭한 선택을 한 것이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속에서 엿보이는 제임스 스튜어트는 실제로도 너무 착한 나머지, 어리숙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가 사는 지역에 있는 계곡에, 그를 상원의원으로 이끈 협잡꾼들은 댐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 댐 건설에는 이 협잡꾼들의 검은 이권들이 몽땅 달려있는 곳, 하지만 스미스 상원의원은 아이들을 위한 야영장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는, 그렇듯 정치와 사회의 온갖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있는 협잡꾼들에 맞서 싸우는 '평범한 시민' 스미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영화에서의 명장면은 역시나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스미스의 연설 장면. "발언권을 양보하지 않는 한 계속 발언할 수 있다"는 국회발언권을 이용해 무려 24시간에 걸친 연설을 감행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롯되는 협잡꾼들의 언론 플레이와 그에 굴하지 않고 '미국적 가치'와 '상식'을 지키려는 스미스 상원의원의 온 몸을 던진 24시간 연설이 미국 관객들에게 인상을 남겼을 터. 이후에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와 인상적인 결말을 만드는 클로드 레인스가 맡는 '조셉 페인 상원의원'의 '막판 활약'도 스미스 상원의원의 24시간 연설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기술적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을 터.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음향 효과다. 스미스 상원의원의 연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가운데, 그 주변부의 음향은 '웅성웅성거리는' 소음으로 처리해버렸다. 당시로서는 단호하고도 빠르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화면 편집도 일품이다. 물론, 이 영화는 특유의 '미국식 애국주의'나 막판 반전이 다소 감상적이라 훗날에는 비판받았지만, 사실 미국인이 미국에 대한 애국을 주장하는 것 자체만을 지탄할 수는 없는 법.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정도면 크게 탓할만한 노골적인 메시지는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듯하다. 중요한 것은, 무려 근 70년 전에 제작된 이 영화가 제공하는 이야기다.
스미스 상원의원은 일종의 정치적 모험을 감행한다. "발언권을 양보하지 않는 한 계속 발언할 수 있다"는 의회발언권을 이용한 ‘24시간 연설‘이다. ⓒ 콜롬비아 영화사
스미스 상원의원을 음해하는 언론의 1면 머릿기사다. 이 언론의 사주는 ‘댐 건설‘에 이득이 달린 지역 협잡꾼들과 연계돼 있으며, 언론의 사주가 전화로 편집 방향 총괄까지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콜롬비아 영화사
그저 단순했던 사건에도 뭔가 ‘의도‘를 담아, 사람을 웃음거리로 전락시키거나 당사자의 의도를 왜곡시키는 기사를 작성해 1면 머릿기사로 활용하기까지 한다. 어떤가?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보던 모습이란 생각, 혹시 안드시는가? ⓒ 콜롬비아 영화사
아이들은 스미스 상원의원이 언론의 왜곡보도에 의해 곤경에 처한 것을 알자, 밤을 지새워가며 스미스 상원의원의 진의를 담은 신문을 인쇄한 뒤, 이른 아침부터 배달에 나선다. 물론 이 아이디어는 스미스 상원의원이 원래 보이스카웃 단장임을 착안한 비서 '클라리스 사운더스(진 아서)'의 아이디어였지만, 악의를 담은 아이디어도 아닐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진심으로 나섰던 덕분에 빛을 발할 수 있었다. ⓒ 콜롬비아 영화사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