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관객이나 시청자로서 나는 소위 퓨전 사극의 ‘난동’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하는 걸까? 분명한 경계선을 그어주고 싶지만 그게 만만치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요새 애들처럼 둥글게 머리를 자른 곱슬머리 홍길동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당시에도 가위는 있었을 테니 아무리 유행이 아니더라도 그러고 다니는 애들이 존재할 수는 있었겠지. 하지만 성유리 캐릭터가 좋아하는 먹을 것을 ‘찐빵’이라고 부르는 건 가능할까? 빵이 비교적 최근에 이식된 단어라는 걸 생각하면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성유리 캐릭터가 청나라에서 ‘알라뷰’를 속삭이는 영어권 커플을 만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정말 희귀하기는 하지만 아주 없지는 않겠지.
지금까지 예로 든 드라마 <쾌도 홍길동>의 경우는 그냥 넘어갈 만하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역사를 망가뜨리겠다고 선언한 시리즈니까. <쾌도 홍길동>의 조선시대는 21세기초 한국 사회를 변형한 가상공간이므로, 역사적 디테일은 비교적 덜 중요하다.
하지만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어떨까? 당시 조선에선 존재할 수 없는 기종의 전자 기타가 등장하며 당시 일본군들이 썼을 리가 없는 총을 휘두르고, 있었을 리가 없는 차를 몰고 다닌다면? 감독은 이걸 퓨전이라고 하던데, 과연 이런 식의 묘사가 영화의 재미나 모습에 얼마나 도움을 주었을까? 난 거의 아니었다고 믿는다. 밀리터리 마니아나 역사 취미가 있는 관객들이 머리를 쥐어뜯는 광경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가학적인 취미가 있다면 모를까. <라듸오 데이즈>도 마찬가지. 영화가 그린 다소 나른하고 생기 없는 30년대 경성의 시대 묘사가 썩 그럴 듯하면서도 내가 영화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었던 건 가끔 농담의 의무라도 짊어진 듯 어색하게 튀어나오는 현대식 어휘들 때문이었다. 난 아직까지 왜 그것들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꼭 30년대식 어휘를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꼭 튀어야 할 필요는 없는데. 역시 이 영화에서도 그들은 영화의 재미에 별다른 재미는 주지 못한다.
퓨전 사극의 존재 이유가 있다면 그건 기존의 역사물이 줄 수 없는 재미를 추가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를 취하기 전에 영화쟁이들이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당시 실제 역사의 고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야기의 재료와 재미의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퓨전 사극’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걸 거의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거라면 왜 처음부터 사극을 시작했는지? 설마 과거의 우리가 텔레비전 사극에서 그린 것처럼 제한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왜 사극의 클리셰가 묻어두고 있던 실제 삶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연구해 볼 생각은 않는 건지? 그 다음에 퓨전을 시작해도 늦지 않을 텐데.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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