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난 종종 디브이디로 60~70년대 옛날 텔레비전 시리즈를 보는 걸 좋아하는데, 그런 걸 보면 재미있는 게 눈에 뜨인다. 주인공이 달려드는 악당을 총으로 쐈다고 치자. (빵빵!) 악당은 고통스럽게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져 죽는데…. 뭔가 중요한 게 빠져 있다. 옷에는 총구멍이 없고 피도 흐르지 않는다. 요새 시청자들의 눈에는 마치 덩치 큰 어른이 총싸움 놀이를 하다가 총 맞아 죽는 흉내를 내는 것처럼 보일 거다. 텔레비전 쇼이니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당시 사람들은 정말 총구멍이나 피 같은 게 없어도 통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시사회에서 <람보 4>를 보았다. 그 영화에선 환갑이 된 람보가 미얀마(버마)에서 포로로 잡힌 멍청한 백인 선교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정글에서 총질과 칼질과 주먹질을 하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단지 이번엔 강도가 다르다. <람보 3>이 만들어진 이후 특수효과에 엄청난 발전이 있었고 또 중간에 스필버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람보 4>에서 인간의 육체가 파괴되는 과정의 묘사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사실적인 파괴 장면을 스펙터클을 위해 백 배 정도 부풀린 것 같다.
<람보 2>와 <람보 3>도 살상이 엄청나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영화들에서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느낌이 남아 있었다. <람보> 영화의 핵심은 웃통을 벗어던지고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낸 람보라는 액션 영웅의 우악스러운 활약이었다. 죽어나가는 악당들은 그의 근육과 완력과 기술을 보여주기 위한 소모품들이었으니 자세한 묘사는 불필요했다. 그들은 그냥 쓰러지는 도미노칩들처럼 주르륵 넘어지며 죽었다.
당시 이 영화들을 보았을 때 난 이런 인명경시가 불쾌했다. 하지만 <람보 4>에 비하면 그 영화들은 비교적 얌전했다. <람보 4>에서 진짜 구경거리는 환갑이 넘은 영웅의 활약 자체가 아니라 그의 활약 과정 중 발생하는 처참한 인간 육체의 파괴에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카렌족이 학살당하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관객들은 그런 잔혹함이 미얀마 군대의 소수민족 억압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어 미얀마 군대가 무참하게 학살당할 무렵에 이르면 그들도 자신이 이 영화에 이렇게 반응하는지 확신이 안 선다. 이 영화에서 카렌족이나 버마군인들이나 모두 얼굴 없는 육체일 뿐이고 그들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무참히 파괴당하면서 관객들에게 그 파괴의 쾌락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 앞으로 보편화할 것인가? 호러 영화팬으로서 나는 다양한 신체 파괴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나는 일반관객들까지도 같은 장면에 익숙해지길 바라지 않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상매체가 그리는 폭력과 고통에 무덤덤해진다면 호러 장르는 어떻게 되나. 세상에는 괴상한 취향을 가진 소수 팬을 위해 남겨놓아야 할 영역이 존재한다. 그 경계선이 점점 흐려져만 가는 게 좋은 일일까?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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