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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루마니아의 시선, 모순덩어리 삶을 들추다

등록 2008-03-09 21:49수정 2008-03-10 13:45

세계의 눈길 붙잡는 루마니아 영화
세계의 눈길 붙잡는 루마니아 영화
세계의 눈길 붙잡는 루마니아 영화
세계 주요 영화제 수상, 영화계에 ‘새바람’
다큐 다름없는 사실주의로 생의 진실 드러내

“흑해의 새로운 물결”.

<뉴욕타임스>가 루마니아 영화를 특집으로 다루며 단 제목이다. 최근 몇 년 새 루마니아 영화들이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칸 국제영화제에서만 크리스티 푸이유 감독의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이 2005년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았고, 이듬해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의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가 황금카메라상, 지난해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 크리스티안 네메스쿠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을 가져갔다.

인구 2200만명, 극장은 80곳, 1년 영화 제작편수 약 15편, 한 편당 평균 제작비 10억원 안팎. 산업 측면에선 영화계의 변방인 루마니아 영화들은 작품성으로 새로움에 목말라 하는 영화팬들의 목을 축여주고 있다. 루마니아 영화, 정확히는 루마니아 감독들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주목받는 루마니아 감독들은 1989년 차우세스쿠 독재 정권이 종말을 맞을 무렵 청소년기를 보낸 30대 후반~40대 초반 세대들이다. 검열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 세대이자 자본주의로 격변하는 시기에 휘말린 혼돈 세대다. 이들 신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하나로 묶기는 힘들다. 그러나 체취는 확실히 비슷하다. 지독한 사실주의다.

이들 감독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한 토막씩 잘라내듯 영화를 만든다. 주로 하루 이틀 사이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다. 편집을 통한 시간 압축을 최소화하며, 한곳에서 장면을 오래 잡아 보여준다. 카메라는 주인공들이 갈피를 못잡는 모습을 비추고, 결말도 똑 떨어지지 않고 열려 있다. 모호하고 모순투성이인 삶을 꾸밈이나 과장, 생략 없이 전할 뿐이다.

이런 흐름은 독재정권 시절 영화가 선전의 도구로 이용되던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외국 영화전문가들은 풀이한다. 독재 정권 시절 루마니아 영화는 비현실적으로 이상화된 인생을 그리기 일쑤였다. 문주 감독은 이전 세대 영화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며 “그 영화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는 영화 감독이 됐다”고 말해 왔다.


신세대 루마니아 영화들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사이를 넘나들며 극사실주의로 독재정권, 자본주의 이행기의 혼돈 등 역사적 체험에 대한 생생한 해석을 담아내면서 그 안에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빼어나게 들여다본다는 평을 듣는다. 영화가 으레 담는 일상의 환상을 사정없이 부수면서도 솔직한 이야기 자체로 관객을 빨아들이는 루마니아 신세대 영화들은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한, 영화에 변방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개봉한 영화 두편

국가의 개인 통제 생생하게 고발
홀몸 노인 죽음에 이르는 과정 담아

올 봄 루마니아 영화들이 비로소 한국 영화팬들에게 그 매력을 선보이고 있다. 연초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가 첫 개봉한데 이어 최근 <4개월 2주 그리고 2일>과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이 개봉했다. 현재 상영 중인 이 두 영화는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작품으로 관객들을 잔인한 일상에서 탈출시켜주기보다 그 풍경 한 가운데 던져 넣고 삶의 맨살이 어떤지 곱씹게 한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
4개월 3주 그리고 2일
■ 삶의 비극적 첫 장-<4개월 3주 그리고 2일> = 사실 주인공 가비타의 아기는 인생 첫 장을 열지 못했다. 4개월에 낙태당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국가와 집단이 개인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통제하는 끔찍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실태 보고서에 가깝다. 그 속에서 출구를 찾아 좌충우돌하는 주인공들을 쫓다보면 긴박감이 스릴러 영화를 볼 때처럼 턱까지 차오른다. 차우세스쿠 정권 붕괴 2년전인 1987년, 낙태는 불법이고 피임기구는 암시장에서야 살 수 있던 시기에 대학생 가비타는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친구 오틸리아가 백방으로 돕지만 어리바리한 가비타 탓에 일이 자꾸 꼬인다. 불법시술자 베베는 절박한 고객의 처지를 이용해 그들을 가지고 논다.

카메라는 거의 의학용 메스다. 꺼낸 태아의 주검도 그대로 보여주고, 부쿠레슈티 밤거리를 뛰어다니며 토악질하는 오틸리아의 바로 옆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까지 잡아낸다. 호텔 예약에도 담배 뇌물이 필요하고, 물건 사는 데도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했던 그 시절 장면들을 빼곡히 쌓아 숨막힐 듯한 당시의 공기를 재현한다. 불합리한 집단, 그걸 이용하는 개인의 악랄함, 악의 없이 주는 상처와 그래도 남아 있는 선의…. 모순의 소용돌이인 삶의 현장을 영화는 냉정하게 바라본다.

라자레스쿠씨의 죽음
라자레스쿠씨의 죽음
■ 삶의 비루한 막장-<라자레스쿠씨의 죽음> = 상영시간은 2시간28분, 그래도 겁먹지 말자. 62살 라자레스쿠가 응급구조 전화를 건 밤 10시께부터 새벽 4시까지의 이야기이니 실제 6시간을 절반 정도로만 축약한 것이다. 그 속에 측은한 유머도 포함돼 있다. 이 영화는 라자레스쿠씨가 병원 4곳을 전전하며 의식과 몸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의료 시스템의 허술함, 의사들의 허망한 권위의식, 라자레스쿠의 바보 같은 몽니…. 영화는 한 인생이 사그라지는 현장을 눈 부릅뜨고 지켜본다.

라자레스쿠의 식구는 고양이 세 마리다. 자꾸 토하고 머리가 아파진 그는 이웃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웃집 남자는 다 도와줄 것처럼 나서지만 부인이 먹을 것을 가져다 주려하자 은근슬쩍 말린다. 구조 요원 미오아라는 라자레스쿠를 구급차에 태우고 피곤한 병원 순례를 시작한다. 첫 번째 병원, 의사가 술 마신 걸 나무라자 라자레스쿠는 “나를 살리는 게 당신의 의무잖아”라고 성질을 부리고 괴팍한 의사는 “내가 당신 손에 술병 쥐어 줬어?”라며 폭언을 퍼붓는다. 두 번째 병원, 뇌와 간을 정밀 검사해야 하는데 교통 사고 환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병원 전체가 북새통이다. 세 번째 병원, 라자레스쿠는 의식을 잃어가고 다급해진 미오라가 의사에게 증상을 설명하자 의사는 권위를 침해당한 것 같아 기분이 상한다. 그는 의식을 잃은 라자레스쿠가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며 내보내 버린다. 파김치가 된 그들은 네 번째 병원에 이르고 라자레스쿠는 드디에 수술대에 오를 준비를 한다.

푸이유 감독은 영화잡지 <시네마스코프>와의 인터뷰에서 “모두 다 죽지만 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무수한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며 “내 영화가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이모션픽쳐스, 유레카픽처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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