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아서 C. 클라크가 죽었다. 우리에게 인공위성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남기고. 향년 90살이니 살 만큼 살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남아있는 우리는 여전히 조금 미진하다고 느낀다. 2001년을 넘기고 7년을 더 살았지만, 여전히 클라크 영감이 그렸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인간은 겨우 달까지밖에 못 갔고(음모론자들은 그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핵융합 기술은 실용화되지 않았고, 생각하는 컴퓨터는 나오지 않았다. 아직까지 고도의 지성을 갖춘 외계 종족과 접촉하지 못한 건 물론이고. 그는 이들 중 하나라도 보고 죽을 자격이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에스에프 작가들이 정확하게 현실을 예측한 적은 없다. 현실은 에스에프 작가들이 그리는 것보다 더 무식하고 예측하기 어려우며 게으르다. 뭔가 말이 맞지 않는 것 같지만 하여간 그렇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미래의 이야기일뿐만 아니라 과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무리 과학적인 정합성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라마와의 랑데부>는 20세기 중후반을 사는 과학소설가의 관점을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어쩔 수 없는 구식이다. 물론 세상은 다른 식으로 발전했다. 내가 알기론 인터넷을 상상한 에스에프는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좀 심심하지 않나? 2008년이나 되었는데, 왜 우린 태양계 곳곳에 우주인을 보내지 못하는가? 로봇 탐사체들이 우주인들이 할 일을 다 해주지 않느냐고? 그래도 모자란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가서 발자국은 찍어야 하지 않는가.
아마, 우리가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것 자체가 그 옛날의 에스에프 작가들이 우리를 세뇌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우주정복’이라는 표현 자체에도 옛 제국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는가. ‘우주정복’이 도대체 뭔가? 달에 가서 발자국을 찍고 깃발을 꽂으면 달을 ‘정복’한 걸까? 우리가 화성과 목성에 지금까지 사람을 안 보낸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쓸데없이 돈이 들고 성과도 없다. 심지어 아서 C. 클라크 자신도 <스페이스 오디세이> 속편들을 쓰면서 그 영리한 무인 탐사선들이 거두어온 정보들을 활용하며 자신의 소설 속에 나오는 우주를 수정해갔다. 우린 현실 세계에서 할 만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서 C. 클라크의 비전이 구현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고 있노라면 여전히 우리는 억울하다. 아무리 이성이 뭐라고 그래도, 우린 우주선을 타고 화성과 목성에 갔어야 했고 달에 기지를 세워야했다. 위에서 제국주의 뭐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지구를 떠난다는 것이 인류라는 종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제발 클라크의 비전이 가까운 시일 안에 현실화되길 빌자. 그리고 그 전에 우리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실수로라도 자멸하지 않기를 빌자.
듀나/소설가·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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