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제비로 연명하던 준이가 단짝 미선과 아비를 찾아 중국행 도강을 시도하다 발각된다. 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6월25일 밤 나는 하필 〈크로싱〉을 본다. 이 글을 쓰며 하필 〈Cucurrucucu Paloma〉 듣는 것처럼 우연일 뿐이다.
국민학교 졸업과 함께 6.25는 내게서 옅어진다. 한국전쟁 발발 58주년이 된단 사실은 전혀 인식되지 않는다. 안하거나 못하는 게 아니다, 되지 않는다.
밤 9시40분부터 단조로운 일상들,
쉽게 상상은 못했으나 북이라 하여 없을 리 없는 때론 행복한 풍경들이 헐겁고 나른하게 흐르다 어둠을 틈타 두만강을 건너는 용수(차인표) 뒤로 총알이 섬광이 되어 빗발친다. 급작스레 의표를 찔린 듯 난 아찔해진다.
누군가의 삶을 '겨누는' 시선은 숨어있대도 노골적이고 실패한대도 광포하고 무책임하다. 저마다의 푼쿠툼(Punctum)을 향해 공중을 날카롭게 가르는 활이나 총탄은 얼마나 무감하고 불가항력적인가, 무책임의 권리는 누가 부여한 것인가. 제작진은 영화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피해달라 했지만 <조선일보>는 개봉전부터 '제2의 요덕스토리'처럼 다루려다 막상엔 정치적으로 외면(영화를 보면 조선의 '북한인권 우위론' 자체가 할랑한 소리란 비판을 받기 쉽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오마이뉴스>는 대놓고 영화가 햇볕정책의 당위성을 대변한다 쓴다. 모두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용수의 처가 결핵으로 죽고 낡은 트럭에 실려갈 때 아들 준이가 울며불며 좇아가는 장면은 참 상투적이고 그네들 삶은 왜이리 찌질한가 싶어 그냥 울게 되는 것이고 처절한 굶주림에 허덕이다 아비로부터 구원의 전화를 받을 때 그 아들 그 준이가 그 울음을 다시 토해낼 때 왜 삶은 속수무책 찌질한가 하여 그냥 또 상투적으로 따라 울게 되는 것이다. 하여 어떤 해석도 하기 전에 먼저 배부른 게 더부룩 거북하고 같은 언어를 쓰며 그들의 고통이 받침 하나 누락없이 들리는 게 미안하고 가슴 먹먹해지는 것이다. 기자에겐 '그냥'만큼이나 경계할 단어도 없겠으나 오늘은 '그냥'이라고만 얘기한다. 살다보면 '그냥'보다 더 적확한 이유가 없을 상황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 찌질한 구석과 저마다의 때를 갖는다. 다만 드러나지 않도록 안간힘 쓰고, 운이 좋으면 더 많이 감출 뿐이다. 나는 그렇게 안도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여도 찌질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운명 앞에서는 건방을 떨지 않으려해도 정말 연민으로 울 수밖에 없다. 일상적으로 삶을 '겨누는' 굶주림, 이념, 종교, 권력, 특히 역사적 숙명-가령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가난이 영구분할된 아프리카같은-따위 폭력적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그들. 용수는 그래서 "하느님은 잘 사는 곳에만 있는 거 아니냐"며 빌어먹을 운명의 불균질성에다 대고 울부짖는 것이다. 1956년 일본 정부는 "이제 전후가 아니다"고 선언한다. 세계 전쟁을 일으켰던 죄책감과 열패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는데 <전쟁을 모르는 아이> 같은 노래를 부르며 자랐던 이들은 어른이 되어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도 답할 줄 모르는 정치윤리적 금치산자가 되어버렸고 오래전 끝난 일이라고만 되뇌는 기계적 확신범이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삼국전쟁처럼 낡은 것이 되었을까. 그나마 햇볕이든 상호든 관심조차 없는 이들이 무장 늘고 연민은 하염없이 사라지는가, 나는 궁금해지는 것이다. * 1995년부터 수년간 그곳에서 300만명이 굶어죽었다. 지금 그만한 위기의 징후들이 재연되고 있다고들 한다. * 물론 난 북한 인권만 강조하는 것은 북 정권의 전복 목적이 강하고 상호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전략이 숨어있다는 생각에 동의해왔다. "북한 인권 문제를 본질적으로 생각하면 이렇다. 한국이나 미국, 일본에서의 인권이라면 정치적, 사회적 자유를 말하는데 북한에는 그에 앞선 원초적 인권이 있다. 굶어죽게 된 사람들한테는 밥 먹는 게 인권이다." 햇볕정책을 대북 철학으로 굳혔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다. 그럼에도 빵과 장미 사이의 고민을 계속 외면할 수는 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연민이 그 고민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한다. * 드라마는 성기고 단순하다. 준이가 비만 보면 천국인 양 웃거나 수용소에 갇힌 소년소녀가 아닌밤 홍두깨로 자전거를 타며 사랑과 행복을 간구하거나 피아노 배경 선율이 여백을 두지 않고 주야장천 흐르는 것 따위 껄끄러운 클리셰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린 때때로 아침 드라마도 보고 더럽게 비싸기만 한 스타벅스 커피도 마시곤 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삶을 '겨누는' 시선은 숨어있대도 노골적이고 실패한대도 광포하고 무책임하다. 저마다의 푼쿠툼(Punctum)을 향해 공중을 날카롭게 가르는 활이나 총탄은 얼마나 무감하고 불가항력적인가, 무책임의 권리는 누가 부여한 것인가. 제작진은 영화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피해달라 했지만 <조선일보>는 개봉전부터 '제2의 요덕스토리'처럼 다루려다 막상엔 정치적으로 외면(영화를 보면 조선의 '북한인권 우위론' 자체가 할랑한 소리란 비판을 받기 쉽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오마이뉴스>는 대놓고 영화가 햇볕정책의 당위성을 대변한다 쓴다. 모두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용수의 처가 결핵으로 죽고 낡은 트럭에 실려갈 때 아들 준이가 울며불며 좇아가는 장면은 참 상투적이고 그네들 삶은 왜이리 찌질한가 싶어 그냥 울게 되는 것이고 처절한 굶주림에 허덕이다 아비로부터 구원의 전화를 받을 때 그 아들 그 준이가 그 울음을 다시 토해낼 때 왜 삶은 속수무책 찌질한가 하여 그냥 또 상투적으로 따라 울게 되는 것이다. 하여 어떤 해석도 하기 전에 먼저 배부른 게 더부룩 거북하고 같은 언어를 쓰며 그들의 고통이 받침 하나 누락없이 들리는 게 미안하고 가슴 먹먹해지는 것이다. 기자에겐 '그냥'만큼이나 경계할 단어도 없겠으나 오늘은 '그냥'이라고만 얘기한다. 살다보면 '그냥'보다 더 적확한 이유가 없을 상황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 찌질한 구석과 저마다의 때를 갖는다. 다만 드러나지 않도록 안간힘 쓰고, 운이 좋으면 더 많이 감출 뿐이다. 나는 그렇게 안도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여도 찌질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운명 앞에서는 건방을 떨지 않으려해도 정말 연민으로 울 수밖에 없다. 일상적으로 삶을 '겨누는' 굶주림, 이념, 종교, 권력, 특히 역사적 숙명-가령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가난이 영구분할된 아프리카같은-따위 폭력적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그들. 용수는 그래서 "하느님은 잘 사는 곳에만 있는 거 아니냐"며 빌어먹을 운명의 불균질성에다 대고 울부짖는 것이다. 1956년 일본 정부는 "이제 전후가 아니다"고 선언한다. 세계 전쟁을 일으켰던 죄책감과 열패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는데 <전쟁을 모르는 아이> 같은 노래를 부르며 자랐던 이들은 어른이 되어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도 답할 줄 모르는 정치윤리적 금치산자가 되어버렸고 오래전 끝난 일이라고만 되뇌는 기계적 확신범이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삼국전쟁처럼 낡은 것이 되었을까. 그나마 햇볕이든 상호든 관심조차 없는 이들이 무장 늘고 연민은 하염없이 사라지는가, 나는 궁금해지는 것이다. * 1995년부터 수년간 그곳에서 300만명이 굶어죽었다. 지금 그만한 위기의 징후들이 재연되고 있다고들 한다. * 물론 난 북한 인권만 강조하는 것은 북 정권의 전복 목적이 강하고 상호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전략이 숨어있다는 생각에 동의해왔다. "북한 인권 문제를 본질적으로 생각하면 이렇다. 한국이나 미국, 일본에서의 인권이라면 정치적, 사회적 자유를 말하는데 북한에는 그에 앞선 원초적 인권이 있다. 굶어죽게 된 사람들한테는 밥 먹는 게 인권이다." 햇볕정책을 대북 철학으로 굳혔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다. 그럼에도 빵과 장미 사이의 고민을 계속 외면할 수는 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연민이 그 고민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한다. * 드라마는 성기고 단순하다. 준이가 비만 보면 천국인 양 웃거나 수용소에 갇힌 소년소녀가 아닌밤 홍두깨로 자전거를 타며 사랑과 행복을 간구하거나 피아노 배경 선율이 여백을 두지 않고 주야장천 흐르는 것 따위 껄끄러운 클리셰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린 때때로 아침 드라마도 보고 더럽게 비싸기만 한 스타벅스 커피도 마시곤 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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