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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블로그] 학교가는 길, 희망의 역설을 보다

등록 2008-07-01 06:24

영화 〈학교 가는 길〉
영화 〈학교 가는 길〉
나의 막내아들 아론이가 가는 학교 길은 매우 가깝다. 아파트 바로 뒷 편에 학교가 있다. 그곳은 이미 유치원 시절부터 아빠와 저녁 운동을 하러 다니던 길이었다. 아론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더 가까운 지름길(?)을 발견해 그 전보다도 훨씬 더 단축된 길로 학교에 가지만 사실 코앞이 학교이기 때문에 그건 별로 의미가 없다. 5분도 채 안 되어 도착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학교 가는 길은 너무 쉽다. 그런데도 아론이의 학교 길을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무거운 가방도 모자라 두 손에 신발주머니와 영어 특별반 교재들을 들고 가야 하는 고사리 손을 보는 마음이 물론 안쓰럽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안타까운 건 과연 그 길이 아이에게 희망의 길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6살 짜리 아프카니스탄 아이인 박타이가 가는 학교 길은 관객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적어도 한국의 서울에서 그 장면을 보았던 모든 관객들에게 박타이의 학교 길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의분을 떠오르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하나 마흐말바프 감독의 의도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설마 그 정도의 의도로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플랑드르와 토론토와 로마와 산 세바스티앙 영화제에서 주목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분명 이 영화에서 젊은 여자 신인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보다 심오할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주제를 찾기 위해서 영상 언어들을 헤치고 다녔다. 영화는 탈레반들에 의해 붕괴된 석굴이 있던 바미안의 풍경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한정된 공간에서 아프카니스탄, 아니 세계와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영혼들의 상처를 어필하려니 얼마나 많은 언어들의 나열이 필요했겠는가? 그걸 하나씩 집어본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다행히 제법 친절한 감독의 설명 장치들을 통해 이야기를 하나씩 열어볼 수 있다.

■ 나도 학교에 데려가 줘!

영화의 줄거리를 먼저 살펴보자. 박타이는 탈레반에 의해 파괴된 바미안 계곡 석불 아래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6살 짜리 소녀이다. 아이는 옆 동굴에 살고 있는 친구 압바스의 공부하는 모습이 부러워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 학교에 가면 글도 배우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학교에 가려면 공책과 연필이 있어야 한다는 압바스의 말을 듣고 박타이는 공책을 사러 길을 나선다. 양손에 계란 4개를 들고 나간 길에서 박타이는 절반의 계란을 잃어버린 채 어렵게 공책 한 권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는 엄마의 립스틱을 들고 압바스를 따라 학교 가는 길에 나선다.


압바스의 학교는 남자학교였다. 할 수 없이 여자학교를 찾아가야만 했던 박타이는 전쟁놀이 하는 아이들에게 붙잡혀 동굴 속에 감금된다. 때로는 탈레반이 되어, 때로는 미군이 되어 자신들이 보고 자란 대로 전쟁놀이를 실감나게 연기하는 아이들의 광포함 속에서 일상의 목적을 빼앗겨 버린 박타이와 몇몇 여자 아이들은 그 장난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알만한 어른들은 일체 아이들의 놀이에 참견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아이들만 더 깊은 상처를 안게 된다. 저들이 장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저 장난에 맞춰 쓰러지거나 죽어줘야 하는 것뿐이다. 다른 옵션은 없다. 지금껏 현대사를 통해서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은 그런 대안 없는 삶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동굴에서 겨우 탈출한 박타이는 여전히 학교가는 길 위에 서 있다. 태양을 따라 강을 따라가다 보면 여자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길을 따라 간다. 그것이 정말로 희망의 길인지 아무런 확신도 없지만 그 길을 가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박타이의 삶을 유심히 보고 있자니 드디어 여자 아이들의 학교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도 박타이가 참여할 만한 공간은 없다. 자리에도 앉지 못하고, 또 자기 반 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교실에서 내쫓긴 박타이는 학교에서 무얼 보았을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전쟁놀이 하는 아이들을 만나 어른들의 세계와 분절된 공간에서 죽은 채 해야 만 벗어날 수 있는 저 지난한 전쟁놀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박타이는 또 다시 학교 가는 길에 나설 수 있을까?

■ 함몰된 공간에 선 아이

박타이가 처한 환경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함몰된 공간이다. 이 영화에서 공간적 이미지가 그렇게 크게 드러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탈레반에 의해 붕괴되는 바미안의 석불 장면에서 마흐말바프 감독은 함몰된 공간 이미지를 묘사해 주고 있다. 그렇게 파괴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아프카니스탄의 사람들! 그들 중에서도 6살짜리 여자 아이! 교육의 기회마저 상실된 채 운명에 순응해 살아야 만하는 함몰된 인간성을 대변하는 게 박타이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그 아이에게도 희망과 꿈이 있었다. 바로 학교에 가고 싶다는 꿈!

영화는 가능성에 대해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되묻는다. 아프카니스탄에도 희망이 있는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가? 그들은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가? 삶이 죽음에 우선하는 게 정말 가능한가? 도처에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있지만 그래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렇게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 내내 쏟아지는 물음들에 단 한 번도 부정적인 답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도 생명이 가치가 있고, 그럴수록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 때문일까? 객관의 세계가 함몰된 현대 사회에서 또 다시 본질과도 같은 근대성을 얘기하는 게 다소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것이 엄연한 사실임을 말해 준다. 박타이는 학교에 가고 싶어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꿈을 포기할 수 없는 건 그 작은 아이에게 있어서 조차 너무나도 당연한 생의 욕구이다. 그래서 학교에 가고 싶어 하고, 공책을 사고, 현실의 장애 속에서도 학교에 가야 한다고 절규한다. 만일에 그 욕망마저 없어진다면 그 세계는 정말로 모든 것이 함몰된 세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모든 물질적인 것이 함몰된 공간에 선 아이의 삶 속에서 희망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관객들의 불편한 심정은 비로소 안도에 이르게 된다. 사실 뒤집어 보면 물질적 욕망에 함몰되어 정신적 욕구를 포기한 삶이 더 비극적인 것일 수 있다. 함몰된 공간보다도 함몰된 정신이 더 비극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박타이나 압바스와 같은 저 아이들의 삶을 동정할 수만은 없다. 오늘 우리의 삶도 그렇게 함몰된 삶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메마르고 척박한 현대인들의 마음과 정서가 바미안 계곡의 함몰성에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박타이의 맑은 눈을 바라보면서 한 없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 상처입은 영혼들의 운명

박타이의 학교 길을 막은 건 아이들의 전쟁놀이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놀이가 박타이의 공책을 찢어놓고, 그 아이의 시간을 방해한 것은 사실이다. 아이들의 전쟁놀이가 하나의 현상이 되어 박타이의 길을 막아 섰다. 그러나 그 길 위에 선 장벽은 무엇이었을까? 거기에서 우린 분명한 역사의 유산을 목격할 수 있다. 아프카니스탄은 25년이란 역사 속에서 러시아 공산주의와 알케에다와 탈레반과 미국의 지배를 받아 왔다. 그 속에서 반복되는 파괴와 살상이 통치의 명분 아래 자행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평범한 인식과 전형적인 사고 패턴이 정착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학교가 그 역할을 해 줄 거라는 믿음은 무너졌다. 박타이는 학교가는 길에 그것도 학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에 의해 휴식시간에 고통을 당하게 된다. 놀이와 전쟁의 경계가 무너진 건 아프카니스탄의 아이들이 전쟁의 일상에 너무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들은 전쟁을 마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놀이의 중심에 전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되면 역사가 저 아이들에게 끼친 해악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역사란게 그런 실체일 수 있는가? 라는 역사학적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카니스탄의 역사는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역사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입은 영혼들의 삶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문제는 이제 그 이후이다. 상처입은 영혼들의 미래 운명이 문제인 것이다. 일상 속에서 전쟁과 놀이의 구분과 경계가 무너진 이 아이들은 미래에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큰 부담이 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저들의 상처가 치유되어야 만 아프카니스탄은 전형적인 국가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상처를 치유하는 길을 발견한 것 같지는 않다. 마흐말바프가 그 치유를 찾고자 했던 것인지는 좀 더 판단이 필요하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죽은 척하면 살 수 있어”라고 외치는 압바스의 말이 좀처럼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왜 일까? 정말 순응하면 모든 게 다 잘 될 것인가? 전에는 탈레반 흉내를 내던 아이들이 돌아오는 길에서는 미국의 흉내를 낸다. 그러면서 죽으라고 말한다. 죽으면 놀이가 끝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물론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어른들은 절대로 아이들의 일상에 참여하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서 아이들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일뿐이고, 어른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일뿐이다. 한 공간에서의 두 세계가 공존하는 저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아니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별개의 세계로 존재하는 이분법이다. 이것이 더 무섭고 두려운 장면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와 동일한 공포가 존재한다. 같은 세계를 살면서도 광우병의 위험에 대해서 절규하는 사람들과 전혀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두 세계가 존재한다. 이것이 공존하는 건지 서로 별개의 궤도를 가지고 존재하는 건지 쉽게 구분이 가지 않는다. 마흐말바프는 그런 괴리적인 두 세계를 자주 영화 속에 삽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더 이상 평범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정말 순응하면 살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비전형적인 삶을 타개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관객의 입장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항변하겠지만 정말 우리 삶 속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살기 위해서 “죽은 척 하”고 있는가?

■희망의 역설을 말하다

이제 이 영화의 중심 주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박타이에게 있어서 학교는 꿈이자 희망이다. 학교에 가면 그가 원하는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그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온갖 희생을 무릎쓰고 학교에 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 학교란 것이 정말로 절대적인 희망이 되고 있는가? 학교에만 가면 글을 배울 수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영화는 그 결과까지 다 보여주고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게 한다. 학교는 있었다. 분명히 학교는 태양을 따라, 강물을 따라가다 보니 나타났다. 그곳에 여자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었고, 선생님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박타이는 자기가 꿈꾸던 학교를 보지 못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학교는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인식되는 그런 학교는 없었다. 도대체 어디가 그 학교란 말인가?

이 점에서 학교는 유토피아가 된다.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궁극적 희망의 세계인 유토피아. 그곳은 궁극적 목적이자 꿈이자 희망이다. 모든 인류는 그곳을 향해 자신의 삶의 전부를 바친다. 그러나 유토피아로 가는 길에 선 우리 인간 동료들 중에 정말 그곳에 도달한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하늘의 뜻을 따라서, 자연의 섭리를 따라서, 때로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업적(종이배로 상징됨)을 따라서 가다보면 자연히 꿈과 희망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면 산다. 그러나 그곳에 도달했다는 보고를 우리는 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희망은 정말로 역설(paradox)인가? 그건 단지 이상이자 목적일 뿐 실제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유토피아와 같은 곳일까? 희망과 꿈이 함몰된 채 역사와 현실에 순응하면서 죽은 척해야만 하는 게 우리의 궁극적 운명인가? 아이들의 전쟁놀이에 박타이가 쓰러졌을 때 ‘아차!’ 하는 회한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감독은 그렇게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전 세계 영화제에 최연소 감독으로 등극한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되기도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감독에게 묻는 건 아니다. 관객인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학교 가는 길’에서 희망의 역설을 보았다. 희망으로 상정된 학교! 그곳엔 분명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희망이 없다든지, 궁극적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니힐리즘을 말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극한으로 몰아붙였던 그 니힐리즘의 영역에서 조차 인류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논의를 멈춰버릴 수 없었다. 그건 여전히 우리의 희망의 중심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 희망의 역설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학교에는 희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역설로서 희망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희망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학교 가는 길!’에.

그렇다. 학교 가는 길에 희망이 존재한다. 학교 가는 길이 곧 희망의 길이다. 그곳에 희망이 있었다. 그것이 희망이다. 박타이의 모습 속에서 관객들은 희망을 본다. 그 아이의 순수한 눈망울 속에서 희망은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는 바로 그곳에 희망이 존재한다. 희망은 박타이가 걸어가는 길 위에서, 감독이 호소하는 호소 속에서, 관객들이 투쟁하는 치열한 쟁점 속에서 항상 그렇게 존재한다. 이것이 희망의 역설이다.

희망의 역설을 뼈속까지 느끼면서 영화관을 나섰다. 마침 광화문에서는 촛불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다. 살수차들은 물을 뿌려 시민들을 흩어 놓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부를 향한 대화의 길이 열리기를 염원하고 있었다. 바리케이트를 넘기 위한 모래주머니를 나르는 줄이 수백미터도 넘게 늘어져 있었다. 행여 그 줄이 끊어질 새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틈새를 끊임없이 메운다. 이 강렬한 염원 속에도 희망의 역설이 있었다. 함몰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아프카니스탄의 상처입은 영혼들과 첨단의 도시 한공간에서 절규하는 한국의 상처입은 영혼들이 자꾸만 중첩된다. 상황은 완전히 다르지만 희망의 역설을 보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이 두 현상은 오늘 우리 시대에 겪을 수밖에 없는 동일현상이다. 안타깝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한 동안 시민들의 틈에 서서 희망의 목소리가 되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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