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먼 자들의 도시
칸 영화제 화제작 2편
칸 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유명 영화제 출품작이란 수식어는 더 이상 흥행 보증수표가 아니다. 오히려 따분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걱정 탓인지, 일부러 그 사실을 숨기기도 한다. 20일 나란히 개봉하는 <눈먼 자들의 도시>와 <바시르와 왈츠를>의 경우는 어떨까? 올해 칸 영화제 개막작 <눈먼 자들의 도시>와, 화제작 중 하나였던 <바시르와 왈츠를>에는 칸의 이름이 어떤 영향을 미칠까?
눈먼 자들의 도시
눈먼 세상 인간들의 극한 타락상
사라마구 원작소설 ‘충실한’ 재현 <눈먼 자들의 도시>는 칸 영화제 개막작이란 사실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조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을 더 앞세워 홍보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처음 상영된 칸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국내 언론 시사회 뒤도 마찬가지다. 중평은 “원작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원작이 따로 있는 모든 영화의 숙명일 것이다. 더욱이 130여 나라에서 번역된 세계적 베스트셀러임에랴. 용접공 출신의 공산주의자 사라마구는 이 소설에서, 한 도시를 휩쓴 ‘백색 질병’(온 세상이 하얗게 보이는)으로 시력을 잃은 인간들이 드러내는 타락한 본성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그렇다면 영화는? 영화는 한 일본인 남자가 미국 뉴욕 시내 한복판에서 운전하다 눈이 멀게 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 이 일본인의 차를 대신 운전해주겠다고 나섰다가 차를 훔쳐 달아나는 차 도둑, 일본인 남자가 찾아간 안과 의사, 결막염 때문에 같은 안과에 갔던 고급 매춘부, 그 매춘부가 약을 산 약국 직원 등이 차례로 시력을 잃는다. 백색 질병은 급성 전염병이었다.
갑자기 눈먼 사람들로 인해 도시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맹인이 된 사람들은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된다. 눈이 멀지 않았는데도 남편을 돌보기 위해 수용소에 갇힌 안과 의사의 아내(줄리엔 무어)는 눈먼 세상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장면들을 홀로 목격하게 된다. 특히 3병동의 폭군(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식량을 독점하며 눈먼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하는 장면은 디스토피아에 대한 극한의 상상력이라 할 만하다.
소설을 7번이나 읽었다는 감독 페르난두 메이렐리스는 원작의 토씨 하나까지도 고스란히 옮기기로 작정한 듯 충실히 원작을 따른다. 눈이 멀어가는 사람들의 순서까지 같을 정도다. 그러나 영상 언어만의 장기로 원작을 재구성하지 않는 한, 소설에 맞서는 영화는 백전백패할 공산이 크다.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뚜렷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고 다채로운 언어로 내면을 표현하는 소설에 비해 배우의 연기만으로 심리 묘사를 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맞선 상대의 외모에 실망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현상된 이미지는 대체로 상상 속의 그것보다 못한 법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시엠엔터테인먼트 제공
바시르와 왈츠를
레바논침공 참전 이스라엘 감독
학살 가해자의 왜곡된 기억 복구 개막작이 안겨준 실망감에 빠져 있던 칸 영화제에 경쟁부문 초반 상영작이었던 <바시르와 왈츠를>은 ‘올해의 발견’과도 같은 참신한 존재로 떠올랐다. 영화는 레바논 침공 당시 이스라엘 군인이었던 아리 폴만 감독이 옛 전우들을 만나 잃어버렸던 전쟁의 기억을 재구성한다는 내용이다. 호전적인 국수주의로 세계의 지탄을 받는 이스라엘 출신 감독이 용감하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점과, 무엇보다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 차별성이 큰 점수를 얻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외피는 자칫 딱딱해질 수 있었던 전쟁 다큐멘터리에 판타지적 성격을 부여하며, 퍼즐처럼 하나씩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은 스릴러적인 재미를 준다. 영화는 검은 사냥개들의 질주로부터 시작한다. 침을 질질 흘리며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개들은 26마리. 감독의 친구 보아즈 레인 부스키라가 꾸는 악몽이다. 보아즈는 1982년 레바논 전쟁 당시 어느 민가를 습격했다가 자신들을 향해 짖어대는 개들을 쏘아 죽인 적이 있다. 친구의 꿈 이야기를 듣던 아리 폴만 감독은 이상하게도 자신이 참전한 레바논 전쟁에 대해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기억은 자신이 편한 대로 재구성하는 ‘디아이와이’(DIY)적인 성격이 있는 것이다. 특히 가해자들은 곧잘 기억을 잃어버리거나 왜곡해 기억한다.
이 영화가 특이한 것은 가해자가 기억과 진실을 찾으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감독은 휴가 장면은 기억해도 전투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그의 친구들도 부분적인 사건들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 부분적인 조각을 맞춰가다 감독은 레바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서히 기억을 회복해 간다. “면도도 안 해본 갓 19살의 나이”에 탱크를 타고 과수원을 향해 “기계적으로 총을 쏘아댔던” 기억, 무더기로 쌓인 시체들을 내다버렸던 기억 등.
결국 감독은 자신의 반복적인 꿈-해변에서 알몸으로 누워 있다가 조명탄이 터진 밤에 총을 들고 걸어가는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 다름 아닌 ‘사브라-샤틸라 대학살’이었다. 1982년 당시 레바논을 침공했던 이스라엘이 꼭두각시로 세운 레바논 대통령 바시르 제마옐이 폭탄테러로 숨졌을 때, 바시르를 지지했던 레바논의 팔랑헤 민병대가 이스라엘군의 비호 아래 베이루트 서부 지역의 두 난민촌에서 3천여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학살한 사건이다. 꿈에 나타난 조명탄은 바로 이스라엘군이 쏘아올린 것이었다.
이재성 기자, 사진 위드시네마 제공
사라마구 원작소설 ‘충실한’ 재현 <눈먼 자들의 도시>는 칸 영화제 개막작이란 사실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조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을 더 앞세워 홍보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처음 상영된 칸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국내 언론 시사회 뒤도 마찬가지다. 중평은 “원작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원작이 따로 있는 모든 영화의 숙명일 것이다. 더욱이 130여 나라에서 번역된 세계적 베스트셀러임에랴. 용접공 출신의 공산주의자 사라마구는 이 소설에서, 한 도시를 휩쓴 ‘백색 질병’(온 세상이 하얗게 보이는)으로 시력을 잃은 인간들이 드러내는 타락한 본성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그렇다면 영화는? 영화는 한 일본인 남자가 미국 뉴욕 시내 한복판에서 운전하다 눈이 멀게 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 이 일본인의 차를 대신 운전해주겠다고 나섰다가 차를 훔쳐 달아나는 차 도둑, 일본인 남자가 찾아간 안과 의사, 결막염 때문에 같은 안과에 갔던 고급 매춘부, 그 매춘부가 약을 산 약국 직원 등이 차례로 시력을 잃는다. 백색 질병은 급성 전염병이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
소설을 7번이나 읽었다는 감독 페르난두 메이렐리스는 원작의 토씨 하나까지도 고스란히 옮기기로 작정한 듯 충실히 원작을 따른다. 눈이 멀어가는 사람들의 순서까지 같을 정도다. 그러나 영상 언어만의 장기로 원작을 재구성하지 않는 한, 소설에 맞서는 영화는 백전백패할 공산이 크다.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뚜렷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고 다채로운 언어로 내면을 표현하는 소설에 비해 배우의 연기만으로 심리 묘사를 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맞선 상대의 외모에 실망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현상된 이미지는 대체로 상상 속의 그것보다 못한 법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시엠엔터테인먼트 제공

바시르와 왈츠를
학살 가해자의 왜곡된 기억 복구 개막작이 안겨준 실망감에 빠져 있던 칸 영화제에 경쟁부문 초반 상영작이었던 <바시르와 왈츠를>은 ‘올해의 발견’과도 같은 참신한 존재로 떠올랐다. 영화는 레바논 침공 당시 이스라엘 군인이었던 아리 폴만 감독이 옛 전우들을 만나 잃어버렸던 전쟁의 기억을 재구성한다는 내용이다. 호전적인 국수주의로 세계의 지탄을 받는 이스라엘 출신 감독이 용감하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점과, 무엇보다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 차별성이 큰 점수를 얻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외피는 자칫 딱딱해질 수 있었던 전쟁 다큐멘터리에 판타지적 성격을 부여하며, 퍼즐처럼 하나씩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은 스릴러적인 재미를 준다. 영화는 검은 사냥개들의 질주로부터 시작한다. 침을 질질 흘리며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개들은 26마리. 감독의 친구 보아즈 레인 부스키라가 꾸는 악몽이다. 보아즈는 1982년 레바논 전쟁 당시 어느 민가를 습격했다가 자신들을 향해 짖어대는 개들을 쏘아 죽인 적이 있다. 친구의 꿈 이야기를 듣던 아리 폴만 감독은 이상하게도 자신이 참전한 레바논 전쟁에 대해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기억은 자신이 편한 대로 재구성하는 ‘디아이와이’(DIY)적인 성격이 있는 것이다. 특히 가해자들은 곧잘 기억을 잃어버리거나 왜곡해 기억한다.

바시르와 왈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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