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블로그 <도쿄!>에서 만나는 ‘서울 그리고 나’

등록 2008-11-17 14:57

못 보는 줄 알았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본 <도쿄!>에 대한 소감은, 그래서 다른 어떤 감정들에 앞서 감개무량하더라는 거였다. 못 보는 줄 알았다가 간신히 본 영화 <도쿄!>는 그렇게 영화를 보기도 전부터 감동적(?)이었다.

미셸공드리, 레오까락스, 봉준호가 함께 옴니버스식으로 만든 <도쿄>는, ‘아키라와히로코 + Merde(광인) + Shaking Tokyo’라는 세편의 단편 영화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내부인이 아니라 외부인의 눈으로 본 오늘의 Tokyo 의 모습 혹은 느낌이다. 재밋냐 아니냐를 떠나서 세가지에 깜짝 놀랐다. 하나는 인접한 이웃나라의 봉준호는 그렇다치고, 미셸공드리나 레오까락스가 도쿄를 바라보는 적나라하고 세세한 시선에 놀랐고(나 역시 외국인인 주제에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각자 찍은 영화들이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왔으며, 마지막으로 영화는 분명히<도쿄!>이고 나오는 언어 역시 일본어를 주축으로 하고 있는데 볼륨을 죽여놓고 본다면 서울이라고 해도 낯설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재능 넘치는 감독들이 잘 빚어놓은 작품들을 보고 있는 내내 흥미로웠고, 영화가 보여주는 낯설지 않은 풍경에 당황스러웠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어느 날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히로코가 자신이 왜 여기 있는건지, 주변인 속에서 자기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 겪는 자기정체성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다. 바쁘고 조밀하고 삭막한 도쿄 도심에서 다들 각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나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가고 있는데, 잘하는 것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찾지 못하는 히로코는 애인과 친구하고 조차 나눌 수 없는 고립감과 혼란에 하루하루 지쳐간다. 작품 후반부에 가면 히로코는 가슴에 아주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있는 자기 몸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발이 없어지고 다리가 없어지고, 손이 없어지고, 팔이 없어지고 머리가 없어지고...의자가 된다. 혹자는 이것을 유령이라고도 평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허깨비 같았다. 의자가 되기 전 사람으로 지낼때 허깨비 취급을 받던 히로코는 외로움과 고립감에 힘들어하지만, 도리어 의자가 되고 나서는 안식을 찾는다. 보여 지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보여 지지 않는 허깨비 인간의 삶보다는, 의자가 되서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을까? 어쨌거나 히로코가 도코에 올라와 스스로 점차 허깨비라고 자각하는 과정 속에 히로코를 어지럽게 하는 도쿄의 빠르고 건조한 환경과 사람들의 정서가 보여지는 데 그것이 하나도 낯설지가 않았을 뿐 아니라, 히로코가 의자가 되가는 과정을 보고 있을 땐 탄식이 새어나올 만큼 공감이 갔다.


히로코는 안정을 찾고 보는 사람은 가슴이 내려앉는 듯 안타까운 즈음, 미셸공드리의 작품이 끝나고 ‘Merde’가 시작된다. 하수도에 살고 있는 광인은 본디 육식도 아닌 특정 꽃만 먹는데 생김은 흉측하기 짝이 없고 가끔씩 나타나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한다. 그러다가 대량 살육전을 펼쳐 수감되는데, 도통 말이 통하지 않아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긴급 공수하고 나서야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지만 그조차도 도저히 일반인으로써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뿐이다. 결국 광인은 교수형에 처해지지만, 사람들이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광인 목을 매달아도 죽은 듯 보였을 뿐 쉬이 죽지도 않던 광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꼭, 최근 일본열도를 경악에 빠트렸던 ‘묻지마 살인’의 릴레이를 보는 것도 같았고 최근 한국에서 일어났던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이나 고시원 방화사건을 보는 것도 같았다. 나름대로 일상은 크게 위험해보이지 않는데 점점 일그러져 대량 살육을 감행하고, 심리학자니 사회학자니 하는 사람들의 입을 빌어서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대충 알아들을 정도의 해석을 달아 대중에게 전해지지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말도 안되는 괘변들 그리고 가둬두고 죽인대도 무슨 특별한 별도 神의 은총(?)이라도 받듯 사라지지 않는 사회 안의 광기, 광인들의 연속..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화면적으로 빛을 발하던 ‘Shaking Tokyo’. 부제를 달라면, 히끼꼬모리가 골목의 중심에서 외출을 외치다 정도가 적합하지 않을까 싶었다. 히끼꼬모리라고 불리는 집 밖을 나서지 않는 외톨이의 심리와 습성이 정교하게 펼쳐지고, 그런 인물이 결단에 가까운 10년만의 외출에서 느끼는 당혹감....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장면구성에 있어서 가장 센세이션하게 다가왔는데, 그것은 히끼꼬모리로 지냈던 인물이 외출에 나서면서 부터 영화는 흡사 좀비영화의 초반부 그것을 보는 듯한 착각을 주었기 때문이었고, 좀비가 등장함으로써 공포를 조성한다면 히끼꼬모리는 사라짐으로써 공포를 배가하더니, 문득 좀비가 난무하는 극복해야 하는 거리도 무섭지만 인간이 집 안으로 사라져버려 혼자 외쳐야 하는 거리는 더 무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 거리며 달리는 텅 빈 거리에서, 나는 주인공만큼이나 마음이 불안했다. 그런데, 그 장면 역시도 낯설지가 않았다. 일본에서는 히끼꼬모리가 집 안으로, 방 안으로 틀어박히지만, 한국에서는 다른 종류의 히끼꼬모리들이 남의 일에 눈 질끈 감고 자기 안위와 가족이기주의만 들여다보며 거리를 빌딩을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면, 귀신이며 요괴며 온갖 것들에 겁을 잔뜩 집어먹던 겁쟁이였던 나는 언젠가부터 내가 볼 일 없는 귀신보다 날마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각자 등돌린 회사에서, 거리에서, 으스스 한기를 느끼곤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영화 <도쿄!>는 감독들의 섬세한 시선과 정교한 두뇌, 유려한 솜씨로 세공되어 난이도 있게 잘 조합된 조형물을 보는 느낌을 주었다. 이 영화에서 미셸공드리, 레오까락스, 봉준호는 각자 삭막한 현대 도시에서 날로 헐벗어 가며 가슴이 뻥 뚫어지고 앙상해져가는 허깨비를, 타인을 극도로 혐오하며 죄의식 없이 무차별 살육하는 광인을, 자기도 집 안에 갇혀 지냈으면서 어느 날 텅 빈 거리에 나서 모두가 집에 쳐박혀버림을 알게 되고 허둥대는 히끼꼬모리 등 각기 다른 소재를 다뤘지만.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도시 안에서 도시의 속도에 지치고 낙오되어 흔들리는 인간을 주제로 다루고 있고 그것을 매우 위태롭고 공포스럽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들이 그린 허깨비, 광인, 히끼꼬모리는 같은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 배열 순서에 상관없이 같은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하며, 변태된 도시가 낳은 그 도시 곳곳에 살고 있는 각기 다른 인간군상들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구가 밀집되고 산업화와 상업화가 고도화되어 부의 불균형과 기회의 불평등이 활발한 어느 도시에 대입해도 크게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공통의 도시, 공통의 인간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영화 <도쿄!>를 보면서 그 안에서 도쿄를, 도쿄의 허깨비를, 도쿄의 광인을, 도쿄의 히끼꼬모리를 보는 어느 순간, 그 위로 서울을, 서울의 사람들을, 서울의 허깨비들을 광인들을 외톨이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때로 허깨비로 가슴에 구멍이 슝 뚫리고, 주변을 향해 수류탄을 퍽퍽 던지는 광인이 욕망할 때도 있는, 도시와 사람들의 속도에 지쳐 사라들과 눈 맞추기를 포기하고 외톨이가 된, 나를 보게 된다. 이쯤 되니, 영화에 찬탄을 해야 하는 건지,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탄식을 해야 하는 건지 고개가 갸웃해졌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앞서 말했듯이 히끼꼬모리가 전염병처럼 확산 되서 인간이 사라진 거리, 일하는 사이보그들이 채운 상상의 거리를 보여준(어찌 보면 이미 이것은 사이보그같이 건조한 마음가짐을 사회생활의 기본인양 생존법칙인양 주입받는 현실의 바로미터일지도 모르지만..) ‘Shaking Tokyo’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제일 먼저 보여진 미셸공드리의 ‘아키라와 히로코’였다. 내가 잘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고, 잘하는 일이 있긴 한 건지 막막하고, 꼭 자로 잰 듯 사이보그처럼 옆의 사람처럼 해야 하는 건지 회의스럽고 그런 한편 처음부터 꾸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어느 순간 상실한 것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꿈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하고조차 도시의 속도보다 현저히 느린 개인 삶의 속도로 인한 소외감이나 존재의 무력감들....그리고 반복되는 도시의 일상. 2000년대에 비단 일본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 자신이 허깨비가 아닐까라 좌절감이나 혼란, 우울을 가져보지 않은 이가 몇이나 있을까? ‘그냥 한구석의 의자같구나, 한시도 쉬지 못하는 신호등 같구나’ 하며, 차라리 정체성에 대한 별다른 고민 대신 그저 주어진 일을 반복하며 익명 속에 살아가는 것을 편안해하며, 한때 소중히 여기던 과거를 향해 ‘나는 그냥 괜찮노라’ 읊조리는 것 낯익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이 편안해졌다면 그 과정 안에서 가슴에 구멍이 나고, 다리며 팔이 닳아져 절뚝이며 넘어져 마음 다쳤던 기간도 필경 있었으리라.

이른 아침 출근길 통근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회사 식당에서 줄 지어 선 사람들을, 조용한 사무실에서 각자의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향해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문득 안쓰럽다는 연민과 동질감이 밀려왔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저들 중 누군가는 실수하기도 하고 좌절도 하며 어지러워하면서도 아직은 구멍 나지 않은 가슴을 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와이셔츠나 블라우스로 가리고 앉아있지만 가슴에 구멍이 난 것을 이 즈음 알고 거울 보며 눈물 쏟고 있기도 할 것이며, 누군가는 뻥 뚫린 가슴은 기본이고 가느다래져가는 팔 다리로 절둑거리며 걷고 있을 것이며, 아주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의자가 되어 있을 테니 그것이 아직 구멍 안 난 상태이든, 구멍 난 상태든, 앙상해져가는 상태든, 의자가 된 상태든 안쓰럽고 수고스럽기는 매한가질 것이다. 의자가 되어 버리기 전에 가슴에 구멍을 뚫지 않아도 되고 내 육신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도시를 획책하는 것은 거창할지라도 그런 나를 부둥켜안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영화에 대한 공감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연민 뒤에 이렇게, 나 하나라도 어떻게 안 될까 알량한 생각을 해봤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