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미인도〉
같이 영화를 본 미인들은 나를 제외하고-허긴 난 미인은 아니니 나를 제외할 필요도 없겠으나- 죄다 눈물을 흘렸으며, 영화를 먼저 보고 온 회사 옆자리 스물다섯살 청춘은 나름 괜찮았다며「색·계」랑 비슷한 과(?)인 것 같다고 말했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난 주말 손익분기점을 넘겼다는 영화 「미인도」를 관람한 내 주변 여성관객들의 반응이다. 나는? 난...솔직히 이 영화가 별로 마음에 안들었다.
「미인도」는 신윤복이 여자였다는 가정 하에 신윤복과 김홍도, 그들을 사랑하는 각각의 남녀들이 펼치는 멜로사극이다. '신윤복이 남장여자였다'라는 동일한 가상을 전제로 만들어진 드라마「바람의화원」은 기대만큼의 시청률을 올리진 못했지만 국민여동생으로 불리는 문근영의 드라마 복귀작인 동시에 그녀의 남장연기란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며 신윤복을 세간의 화제 중심에 세웠다. 집에서는 엄마가, 회사에서는 부서장이, "신윤복이 정말 여자인거냐"를 물어올 정도로 관심도 후유증도 그 범위가 광범위했다.
영화의 소재가 개봉시기에 맞춰 제대로 화제가 된 운 좋은 시의성에, 톱스타는 아니어도 제법 괜찮은 필모그래피를 쌓아오면서 노출연기를 하지 않았던 김민선이란 배우가 길고 찐하게 벗고 나온다는 것으로 증폭된 관심이 더해지면서 영화「미인도」는 개봉도 하기 전부터 꽤나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더랬다. 흔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서사구조나 미술, 배우들의 연기, 음악 등등 영화 전반적인 수준은 크게 흠잡을 것 없이 볼 만했고, 사람들에게 회자됐던 뒷태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김민선도 관객들이 아쉬움 가질 여과없이 아주 원없이 벗어줬다. 그런데.. 볼 만했을 뿐, 불만은 있었다.
김민선은 사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다. 연기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어느 정도 영화계에서 인지도가 있는 젊은 여배우가 이렇게 과감한 노출과 높은 수위의 베드신을 해야하는 영화를 선택하기까지, 갈등도 적지 않았을 거다. 옆자리 후배 말대로 「미인도」의 베드신은 컷 수와 길이 면에서나 수위 면에서 보면「색·계」에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미인도」에서는「색·계」가 던져줬던 농밀한 숨가뿜이나 아주 가찹게 와닿던 주인공의 갈등, 영화가 다 끝난 후에 사포로 가슴팍을 쓸어내린듯 느껴지던 알쌀함은 전해지지 않았다.
크게 부족한 부분을 딱 꼬집어 말하기 애매한, 시쳇말로 2% 부족했는데, 그 부족한 2%가 만든 맛의 차이는 대략 20% 이상 격차가 났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나는 김민선이 분한 영화 속 인물의 애환보다 김민선이 연기를 하면서 겪었을 배우로써의 애환이 더 많이 와닿았다. 솔직히 김민선이 연기를 참 잘하진 않았지만, 그건 김민선의 연기 부족때문은 아니었다.
「색·계」에 그 많은 섹스신에는 감독이 굳이 나서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납득가능한 이유가 존재했다. 「색·계」의 남녀 주인공은 사상적으로나 일상적으로 한 공간에서 서로를 이해하거나 사랑하면서 공존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양립은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을 유혹해야하는 사명을 띈 접근으로 가능했고, 그들이 살고있는 시대나 그 시대 속에서 그들이 선택한 삶은 지고지순하고 점진적인 사랑을 논하기엔 위태롭고 가팔랐다. 「색·계」는 이렇게 인간이 갖는 본연의 감성보다 이념이 우선시됐던 격변의 시대에 던져진 두 남녀가, 이념을 위해 시작된 육체의 탐닉이 이념과 배치되는 정신적 교감으로 이어지면서 맞닥드리는 갈등과 파국, 페이소스..같은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었고, 인간의 사랑이 꼭 정신적인 이끌림과 소통을 거쳐 육체로 귀결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없슴을 부록처럼 들이밀었다.
그래서 「색·계」에서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 필요에 의해서건 욕정에 의해서건 육체적 관계로 관계를 시작해서 이어가는 인물들이 차츰 서로를 알아가며 의지하고 갈등하는 상황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는 것이 영화의 중요관건이었다. 세계적으로 이슈가 될만큼 과감했던「색·계」의 베드신은, 이렇게 개인간의 정사보다 한층 더 격렬했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시대로부터 도피의 웅크림이자 서로를 향한 기대임을 보여주기 위해 탄생했고, 그것에 성공했다. 「색·계」의 실감나던 베드신은 비단 '남녀가 섹스하고 있다', '야하다'라는 관객의 관음증 충족을 뛰어넘어, 인물들의 감정을 보는 사람이 함께 호홉하게 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완성되고 빛났다.
이런 측면에서,「미인도」의 각종 노출씬과 베드씬은 분명 관객의 시각적 욕구는 만족시키는데 성공했으나 관객이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영화를 보는 동안에 함께 숨가쁘고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가슴에 묵직하게 와닿는 탄식을 구현하는데는 실패했다. 젊고 매력적인 남자 배우의 최후는 안타까왔지만, 관객들이 흘린 눈물은 남녀구분이 엄격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남자인척 행세하며 살 수 밖에 없었던 여성으로써의 신윤복이나, 열렬한 사랑의 대상인 강무와 오랫동안 은원과 사제지간으로 이어진 정과 연민의 대상인 김홍도 사이에서 갈등하는 젊은 신윤복의 비애에 대한 공감은 아니었다. 부러, 어긋난 사랑으로 인한 전체적인 파국에 대한 안타까움도 아니었슴은 물론이다.
야한 영화로 포장해놓고 막상 까봤을 때 엉뚱한 조연배우만 열심히 벗고 나오거나 어두침침한 화면 속에 어정쩡한 실루엣이나 단편적인 컷처리만 보여주며 어째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던 수많은 한국영화들보다야 착한(?) 결과물이었지만, 이런 이유로 나는 「미인도」에 그만큼의 베드씬이 모두 필요했는지, 그런 방식이어야 했는지 불만이 들었다. 심지어는 중간에 '헉'하고 헛웃음을 지은 장면도 적지않았다. (차가 밀려서 일행과 떨어져 영화가 막 시작한 즈음 따로 입장을 하고 혼자 빈자리에 앉아 봤는데, 심각한 베스씬에서 헛웃움이 비질비질 새나와 앞뒤옆에 앉은 연인들의 눈치가 보였다 ㅡ.,ㅡ)
사족에 스포일러가 되겠으나 몇가지 예를 들자면. 남의 창고를 관리하던 신윤복의 정인과 신윤복은 그 창고 안을 난장판을 만들며 정사를 벌이는데, 그게 나중에 전혀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뭐 그런거야 그렇다쳐도, 비단이 쌓인 창고 안에 새장은 물론이고 마굿간까지 있어 백마가 있는데, 이들은 심지어 백마를 타고 산야를 질주한다. (무슨..반지의 제왕 패러디씬인줄 알았다) 신윤복이 물에 빠져 옷이 젖으니 적나라하게 젖가슴의 유두가 보이는 것도, 그럴 수는 있겠으나 너무나 적나라하여 도포 안에 아무것도 안입었다는 말인가 싶어 황당했으나, 그 정도는 약과였다. 김홍도가 신윤복을 강제로 범하려는 장소는 집안(도화서인지 개인 집인지는 모르겠으나)의 정자이며, 창호지 창문을 활짝 열어제낀 방에서 김홍도가 신윤복을 범하는 장면의 프레임은 창 밖의 카메라를 향해 창문 앞에서 벌어진다. 저 집엔 하인 한 명도 없나 아니면 김홍도는 남에게 섹스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변태란 걸까, 영화를 보는데 장면에 몰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딴 생각들이 들었던 것은, 장면장면들이 그럴듯 해 보인다고 해서 개연성이 충족되지 않으며, 개연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은 영화에 몰입할 수 없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영화의 모든 장면이, 모든 베드씬이 나빴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어설픈 씬들은 넌센스였고 사족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불만은, 영화 러닝타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노출씬과 베드씬이 그만큼 필요했냐는 것이다. 일정부분 필요하다고 인정하지만 지나치게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시간을 과감하게 줄이고 김홍도와 신윤복간의 관계, 강무하고는 또다른 애정의 색깔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아쉬웠다. 많이 벗어야 야하고, 섹스씬이 많아야 농밀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걸 감독이나 배우가 몰랐겠는가. 관객인 나보다 훨씬 민감하고 심각하게 고민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행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을 거다. 특히 김민선에겐 출연 결심까지보다 촬영과정이나 완성본을 보면서 더 많은 갈등과 애환이 있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미인도」 속 신윤복이 아니라 신윤복을 연기한 김민선에게 감정이입하는 아이러니를 겪었다.
그래서...「미인도」는 그럭저럭 재밋는 영화였고, 흥행도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아쉬움과 씁쓸함으로 까(대)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눈에「미인도」는 김민선을 소진한 영화였고..「미인도」의 흥행도 여배우를 소진해 얻은 성적표, 그 결과물로 보이니 말이다.
끝으로. 드라마「바람의화원」과 달리「미인도」의 신윤복 차용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나 실존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여지와 픽션이란 장르의 성격을 감안한 변주는 납득가능하지만, 상업적 악용을 위해 심각하게 편향된 왜곡이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신윤복이 실제로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야 오늘을 사는 우리들 중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마는 남자라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픽션에서 그가 여자였다는 가상은 얼마든지 전제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신윤복만이 아니라 김홍도도 마찬가지고 후사가 없었던 각종 왕들도 마찬가지다.(예전에 사파이어왕자란 만화를 보면...불가능이 어디있겠나?) 문제는 그런 전제를 삼아도 전반적인 사실관계를 크게 왜곡하지 않아야 하고 그런 전제를 가상하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바람의화원」은 다른 실존인물들을 무리하게 왜곡하지 않으며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적절히 버무려 신윤복의 작품을 보여주고 해석해내는데 무게를 두고 전개되었다. 여자 신윤복은 상상의 산물이지만, 주인공이 신윤복이어야 하는 이유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인도」는 역사적 사실 면에서나 그림의 비중을 고려시 꼭 실존인물인 신윤복과 김홍도를 가져와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는 꼭 화가여야 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신윤복을 보봐리부인같은 파격적 연애인으로 만들고 김홍도를 살인자로 만들었는데, 이건 역사왜곡을 떠나 시효가 발효되었을 뿐인 심각한 명예훼손이다.
결론적으로「미인도」는,「미인도」의 마케팅과 흥행은, 김민선만 소진한게 아니라 신윤복이라는 인물, 교과서에도 실릴만큼 시대를 풍미했던 조상을 둘이나 소진해버린 형국이다. 소진이 아니라 활용했거나 상생했다면, 굳이 차용하지 않아도 될 인명이나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될 노출과 베드씬을 버릴 수있었다면, 애초에 보여주고자 했던 이야기 본연에 충실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오리혀 훨씬 담백하고 절절한 멜로사극이 하나 나올 수도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든다. 「미인도」하나 만이 아니라, 당장 관객이 조금 덜 들지라도 관객을 유혹하는 당장의 꺼리에 매달리지 말고 원칙을 사수해 제대로 완결된 영화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현재 충무로 전체가 맞닥드린 난국을 돌파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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