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이스턴 프라미스’
‘냉혹함’과 ‘포근함’은 서로 다른 세계의 언어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조산실의 풍경과 사내들이 서로의 목을 향해 칼질을 서슴지 않는 ‘조직’의 세계는 좀처럼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스파이더>(2002)와 <폭력의 역사>(2005)에서 기묘한 느낌의 세계를 구축해 온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신작 <이스턴 프라미스>는 화해할 수 없는 두 세계가 충돌할 때 나타나는 풍경들을 서늘하게 그린다.
런던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조산사 안나(나오미 와츠)는 ‘타티아나’란 이름의 열네 살짜리 그루지야 소녀가 낳은 아기를 받아 낸다. 숨진 소녀와 살아난 아기. 안나는 아기의 연고를 찾기 위해 소녀의 일기장에 꽂힌 명함 주소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인자해 보이는 노인 세미온(이민 뮬러-스탈)이 안나를 맞는다. 세미온은 겉으로는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신사지만, 실제로는 동유럽에 근거를 둔 런던 최대 범죄 조직 ‘보리 V 자콘’의 두목이다. 세미온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안나는 조직의 운전수 니콜라이(비고 모텐슨)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다.
안나는 러시아어로 써진 소녀의 일기를 읽을 수 없다. 세미온은 안나에게 “일기를 번역해 주겠다”고 말하고, 안나는 그에게 일기 사본을 넘긴다. 일기에는 안나가 모르는 뜻밖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세미온의 세계’는 ‘안나의 세계’에 개입한다. 니콜라이는 안나에게 “당신이 있을 곳은 저기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에요. 저 같은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셔야 합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비정한 조직은 니콜라이를 세미온의 아들 키릴(뱅상 카셀) 대신 사지에 내몬다. 사우나실 안에서 무방비 상태로 두 괴한의 침입을 받은 니콜라이가 보여주는 절박한 폭력의 몸짓은 영화의 ‘백미’라 꼽을 만하다. 싸늘한 주검이 된 타티아나가 그랬듯 니콜라이도, 세미온도 한때는 ‘포근함’의 세계에 속했던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11일 개봉.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사진 마스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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