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욱의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원작으로 하는 동명의 영화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고, 그래서 결혼했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를 다시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그 남자와도 결혼한다는 스토리를 축구에 빗대어 진행한다. 그래서 이것은 아내의 결혼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축구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아내의 결혼이라는, 한 여자가 두 명의 남편을 갖는다는, 한국사회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이야기를 누구나 좋아하는 축구라는 주제와 연관시켜 펼쳐 보임으로써 거부감을 최소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남성으로는 드물게,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아내의 결혼, 그러니까 소설에서 ‘polyamory’라는 그럴듯하고 멋진 말로 설명하는, 어감이 좋아서 이 정도는 실천하고 살아야할 것만 같은, 다자연애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다. 그리고 진보적으로 보이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누가 묻거든 그렇게 얘기하고 다닐 참이다. 하지만 이 이면에는 결코 나에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존재한다. 결코 내 아내가, 혹은 애인이 다른 사람과 나를 동시에 사랑할리 없다는 믿음, 차라리 날 버리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지, 동시에 둘을 원하는 그런 일은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리라는 생각, 그래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믿음에서 오는 안도감이 있는 것이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인 노덕훈은 그토록 괴로워하건만 그것은 결국 남의 일이지 결코 내 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 비겁한 것은 다수의 한국 남성들이 어디까지나 ‘밤문화 체험’을 명목으로 polyamory를 실천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물론 문화적으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polyamory와 오입질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해도 축첩을 일삼던 조선 남성의 억압된 욕망이 이 나라 성산업의 다양성을 꽃피웠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단지 거래일뿐 사랑이 아니라 주장한다면, 그렇게 이해할 뿐, 경험이 일천한 나는 답하기 곤란하다. 아무튼 나는, 이것이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는 남성들의 기본적인 심리일 것이라 생각한다. 남의 불행을 구경하는 즐거움.
그렇다면, <아내가 결혼했다>는 여성들에게 즐거운 일인가? 물론이다. 남들이 하나밖에 없는 것을 둘씩 거느리는 것은 당연히 즐거운 일이다. 영화 속 노덕훈은 여자 주인공인 주인아가 관계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던지, 결혼만하면 그녀를 완전히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데, 그 순진하고 진부한 생각을 전복하는 것도 통쾌한 일이다. 남편에게 얻을 수 있는 것, 이를테면 안정감이나 사랑, 따뜻함, 배려, 섹스, 이런 것들을 한 사람만이 아니라 두 사람에게 제공 받을 수 있으니 인생의 재미도 곱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 속, 노덕훈의 괴로움과 주인아의 기쁨만큼이나 이 영화가 여성에게 우호적이라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남편이 주는 것이 안정감이나 사랑, 따뜻함, 배려, 섹스만이 아님은 아직 미혼인 나도 알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아내에게 버젓이 요구하는 일들은 너무나 많다. 사회생활을 함에도 가사와 육아를 전담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집에 대한 봉사와 헌신, 남편에 대한 순종이 당연시된다. 물론 이 모든 일이 자발적인 사랑 속에 이루어진다면, 우리네 어머니들이 그랬다고 애써 믿듯이, 숭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 가부장제의 틀과 그 안에서 흘려야 하는 눈물과 한이, 남편이라는 존재와 함께 따라오는 것은 사실이다. 남편이 둘이라면 아내라는 이름으로 헌신해야 할 가족도 둘이 되는 서글픈 현실. 영화에서 주인아는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별을 따다 달래, 달을 따다 달래, 난 그저 남편만 하나 더 갖고 싶을 뿐이야” 그녀는 결국, 별도 달도 얻지 못하고, 하늘처럼 모셔야하는 남편만 하나 더 얻은 것이다. 그녀는 일주일을 둘로 나누어 두 명의 남편 곁에서, 가사에 충실하고, 시집에 최선을 다하며, 남편에게는 헌신한다. 두 명의 남편을 가졌기 때문에 더 빈틈없이 각각의 남편들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녀는 두개의 가부장제에 속하며, 스스로 이중의 억압구조를 만들고 있다. 단지 남편이 둘이라는 이유로. 그래서 난 주인아가, 남편이 하나 더 있다는 점만 감수 한다면, 남성 판타지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예쁘고, 술 잘 마시고, 스포츠 좋아하고, 섹스도 잘 하며, 집안일도 잘하고, 시집에도 잘하는 여자. 주인아는 자신의 상황을 축구에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 팀은 투톱 체제야” 그렇다. 결국 축구의 규칙을 어기는 것도 아니고, 축구 자체를 거부하는 것도 아닌, 다른 모든 팀이 한명의 스트라이커를 세울 때, 두 명의 스트라이커를 배치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스트라이커가 두 명이 되든지, 세 명이 되든지, 혹은 열한 명 전원이 되든지, 상관없다고. 결국 중요한 것은 골을 넣는 한 선수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축구를 하지 않으면 된다. 난 본래 야구를 더 좋아하니까.
하지만 난,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남편이 주는 것이 안정감이나 사랑, 따뜻함, 배려, 섹스만이 아님은 아직 미혼인 나도 알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아내에게 버젓이 요구하는 일들은 너무나 많다. 사회생활을 함에도 가사와 육아를 전담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집에 대한 봉사와 헌신, 남편에 대한 순종이 당연시된다. 물론 이 모든 일이 자발적인 사랑 속에 이루어진다면, 우리네 어머니들이 그랬다고 애써 믿듯이, 숭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 가부장제의 틀과 그 안에서 흘려야 하는 눈물과 한이, 남편이라는 존재와 함께 따라오는 것은 사실이다. 남편이 둘이라면 아내라는 이름으로 헌신해야 할 가족도 둘이 되는 서글픈 현실. 영화에서 주인아는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별을 따다 달래, 달을 따다 달래, 난 그저 남편만 하나 더 갖고 싶을 뿐이야” 그녀는 결국, 별도 달도 얻지 못하고, 하늘처럼 모셔야하는 남편만 하나 더 얻은 것이다. 그녀는 일주일을 둘로 나누어 두 명의 남편 곁에서, 가사에 충실하고, 시집에 최선을 다하며, 남편에게는 헌신한다. 두 명의 남편을 가졌기 때문에 더 빈틈없이 각각의 남편들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녀는 두개의 가부장제에 속하며, 스스로 이중의 억압구조를 만들고 있다. 단지 남편이 둘이라는 이유로. 그래서 난 주인아가, 남편이 하나 더 있다는 점만 감수 한다면, 남성 판타지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예쁘고, 술 잘 마시고, 스포츠 좋아하고, 섹스도 잘 하며, 집안일도 잘하고, 시집에도 잘하는 여자. 주인아는 자신의 상황을 축구에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 팀은 투톱 체제야” 그렇다. 결국 축구의 규칙을 어기는 것도 아니고, 축구 자체를 거부하는 것도 아닌, 다른 모든 팀이 한명의 스트라이커를 세울 때, 두 명의 스트라이커를 배치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스트라이커가 두 명이 되든지, 세 명이 되든지, 혹은 열한 명 전원이 되든지, 상관없다고. 결국 중요한 것은 골을 넣는 한 선수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축구를 하지 않으면 된다. 난 본래 야구를 더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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