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아가씨>는 소록도 한센인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도, 영화를 만났던 시공간도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게으름과 덜그덕 거리는 감정기복으로 꽤 여러 날을 그저 내 머릿속에서 잠을 잤다. 볼썽사납기는 눈앞의 일상이나 신문 너머 세상이나 매일반인 월요일, 그 동안 춤을 추던 감정을 차곡차곡 추스르다가 <동백아가씨>생각이 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인들이 한 가지 이슈만은 이견 없이 뭉쳐질 때가 일본을 욕할 때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 드는 의문들이 있다. 왜, 그 한 많고 탈 많은 일제 청산을 그 따위로 해치운 박정희 정부에 대해서는 ‘먹고살게 해줬다’는 명분 하에 슬그머니 언성을 낮추는 걸까? 왜, 일제시대가 끝나고 나서도 일제에 의해 유린당한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 연장전을 하거나 한술 더 떴던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 걸까 라는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애국심’이 부족한 것 같다.)
대게 인권과 관련된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이, <동백아가씨>는 철저하게 유린당한 개인의 삶을 조망함으로써 우리가 지나온 시대와 살고 있는 사회를 보여준다. <동백아가씨>의 주인공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한센병 환자인 부모와 강제 격리되어 집단 수용생활을 경험했고 이후 부모와 같이 살게 되었지만 부모가 연달아 사망한 후 어린 나이에 강제노역을 해야 했고, 해방 즈음 자신도 한센병에 걸리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해방은 되었지만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은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다. 뒤늦게 결혼을 했지만 아이를 낳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 그녀는 몰래 임신기간을 견디고, 몰래 닭장에서 출산을 했다. 그러고 나서도 아이를 떳떳이 기를 수도 없었고 아이와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며 살아야 했다. 불운한 시대가 남긴 인생의 상처들과 아직까지 이어지는 사회의 편견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그녀를 비롯한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은 현재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소송을 이어 가는 중인데, 영화는 가수가 꿈이었다는 그녀가 부르는 <동백아가씨>가락에 그녀의 한많은 삶의 기억들을 더듬어 올라가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싸움을 담담히 담아낸다.
이 영화는 좀 특별한 송년회에서 만나게 됐다. 처음 이 영화를 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실 나는 이 영화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밝은 기분을 유지하고 싶었던 얄팍한 마음에, 철저하게 유린당한 한센병 환자의 삶과 인권을 돌아본다는 설명이 달린 이 영화가 유쾌하거나 즐거운 마음을 줄 것 같지 않았다. 그서 내색은 하지 못했지만 망설이며 보게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영화는 훨씬 재미있었고 꽤나 여러 번 나를 웃게 만들기도 했다. 랭보는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냐고 했지만, 영화의 주인공이나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존경받지 못할 삶이란 어디 있겠냐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주인공은 영화 너머 우리에게 아무 것도 묻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는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 두 가지 생각이 집요하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처음 주인공이 꿈이 가수였노라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쿡 웃음이 났다. ‘그건 불가능한 꿈’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것이 불가능한 꿈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나는 주인공의 노래를 들어보기도 전이었고, 주인공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지도 못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부터 꾸는 꿈이라고 할지언정 그게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내가 평소 비난해온 세상과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은 항상 땅바닥을 깊게 파고 들어가고 싶은데 그 날도 그랬다.
그리고 들었던 다른 생각은 일본이 했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 잘못과 별개로(일본은 분명히 잘못한 것이 있고 그것에 대해 제대로 사과도 하고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러나→), 어째서 일본정부가 아닌 한국 정부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인권을 유린당했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되묻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정부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이건 오히려 남의 나라 정부보다 한국 정부가 더 심각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해방이 되고나서 해방이 해방답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에서, 일본의 책임 공방에는 뜨거운데 한국정부의 책임 문제에는 등한시하는 부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 일본 정부가 같은 문제에 있어서도 중국이나 대만의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와 한국의 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은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닌 것이다.
영화 <동백아가씨>가 상영된 자리는 어떤 모임의 송년회 자리였다. 올 해 각자가 가장 감동적으로 읽었던 책을 기증하고, 그 책을 경매에 붙여 책 기부자는 책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구절들을 읽어주고 그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은 경매과정으로 통해 책을 구입하는데, 그렇게 모인 경매 수익금을 전액 한센병 환자단체에 기부하기로 했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한센병과 특별히 인연이 있다거나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자리는 아니었지만 책들은 꽤 고가로 팔려나갔고, 경매가 후끈 달아오를수록 거기 모인 사람들은 잔뜩 신나 했다.
그 날 그 자리는, 영화도 인상적이었지만, 참석자들도 꽤 인상적이었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감옥에 막- 다녀온 청년(전과자라고 해서 깜짝 놀랐었는데, 전과 사유를 듣고는 더 놀랐다), 평화네트워크에서 인턴쉽을 하고 있는 외국인 친구들, 스무 살 아들을 데리고 나타나 고가의 경매에 한몫 단단히 해주신 올해 파킨슨병 선고를 받았다는 아주머니, 각종 인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친구들(시간이 꽤 지나다 보니 생각이 가물가물).
영화 <동백아가씨>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이 사람들을 보면서도 똑같이 들었다. 허구헌날 한국 사회에 한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스리슬적 한국사회와 닮아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흠칫 놀랐고(허구헌날 언론을 욕하면서도 언론이 알려주지 않으면 도통 무지한 나 자신), 먹고 살만해졌다는 한국 사회에서 언제 끝날지 끝도 보이지 않은 채 버젓히 행해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에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내가 힘들다고 찡찡거렸던 것이 좀 창피했다. 난..아직 젊고, 건강할 뿐더러, 양심에 따랐다는 이유로 감옥에 다녀오거나 한 것도 아닌데..뭘 힘들다고 자꾸 헐떡거리는 건지, 이 정도에 왜 힘들어하는 건지 말이다.
지난 며칠간 났던 뉴스들을 새삼 돌려보지 않아도, 한국 사회 태반의 뉴스들은 한국 사회에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원칙과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데서 파생한 것들이다.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뉴스들로 도배된 신문 말고, 원칙은 당연히 지켜지고 원칙 그 이상이 지켜지는 뉴스들로 도배된 신문을 볼 수 있는 날은 언제쯤 가능한 것일까? 언제쯤이면 각자의 자리에서 당연한 인권을 지키기 위해 다 내놓고 싸워야 하는 일들이 사라질까? 어떻게 하면 그런 이들이 꾸는 꿈이 허황된 이상이 아니라 꾸워봐도 좋을 원칙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어찌되었거나. 사회는 척박하고 꿈은 허황될지언정, 마음에서 꺼트리지 않고 품어낼 수 있는 각자의 <동백아가씨>가 존재하는 삶은 아름답구나 생각이 들던 밤.. 고층빌딩들로 둘러쌓인 광화문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길담서원에서 영화 <동백아가씨>를 만나고 착한 이들이 꾸는 여러 가지 <동백아가씨>을 만났던 그 밤. 집으로 돌아오는 종로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 가사를 뭉퉁그려 <동백아가씨>를 흥얼거리며.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의 마음에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이 거북하다면 부디 그것이 우리가 퍽이나 자랑스럽게 외치던 “대~한민국”의 이면에 대한 객쩍음과 부끄러움이길…
그러니까 영화속 그녀가 꾸었던 꿈은...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꿈을 박제시킨 것은 기실 병이 아니라 우리 사회였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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