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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블로그] <마린보이> 헐리웃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까닭?

등록 2009-02-10 14:58

오랜만에 극장가에 새로 개봉한 한국영화 <마린보이>를 봤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큰 기대를 걸고 간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밌지 않았다. 조재현, 김강우, 이원종, 오성록 같이 이름 석 자 만으로도 연기에 대한 신뢰가 생길만한 배우진에, 마린보이라는 독특하고 긴장감이 느껴지는 소재, 나름 볼만했던 화면구성까지. 갖출 것은 뭐 한 가지 빼놓지 않고 다 갖추고 있는 듯 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부대꼈다. 돌아와서 포털에 들어가 영화평들을 검색해봤다. 전반적으로 무난한 화평들이 대세였고 간간히 ‘2% 부족한 느낌’이란 평들이 있었다. 역시 갸우뚱. 내 눈엔 2%만 부족한 게 아니었다.

70년대 중반에 태어나 한국영화가 문예물과 에로물로 정점을 구가하던 80년대부터 침체국면에 빠져 사경을 헤매던 90년대 중반까지 학창시절을 보냈던 나는, 한국 영화보다 헐리우드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자란 세대다. 극장을 봤던 영화 뿐 아니라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토요명화’나 ‘명화극장’(제목이 맞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을 빼먹지 않고 챙겨보시는 부모님 곁에서 말없이 그 시간을 기다렸다. <졸업>,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혹성탈출>, <수퍼맨>같은 작품들을 보면서 영화에 맛을 들였고, 더스틴 호프만, 비비안리, 잉그니트 버그만 같은 클래식한 헐리웃 배우들의 이름을 그 시절을 풍미했던 한국 영화배우들의 이름보다 먼저 외었다. 그리고 가끔씩은 왜 한국엔 저런 영화들이 없을까 어린이답지 않은(?) 깊은 탄식을 하기도 했다. 제법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 시절 나는 헐리웃 영화에 꽤나 열광하던 꼬맹이었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헐리웃 영화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모든 헐리웃 영화라기보다는 극장에서 주로 개봉되는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대한 싫증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 헐리웃 영화에 대한 이런 싫증은 ‘볼거리’의 부재 때문이 아니었다. 되려 러닝타임 내내 넘치도록 제공되는 볼거리 대비, 보는 내내 납득되지 않는 개연성 부족과 인물이나 그들이 맺는 관계의 가벼움 때문이었다. 영웅의 활약상 속에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이 부서져나가는 것이 화면 사이드로 우르르 쏟아지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밑도 끝도 없이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그 사랑을 위해 온몸이 부서져라 올인 혹은 올킬을 넘나드는 주인공들이 사랑스럽기는커녕 쌩뚱 맞게 여겨졌고, 절대절명의 순간에 뜬금 맞게 등장하는 정사신이나 개(애완동물)사랑을 보는 것이 어지러웠다. 자연스럽게 헐리웃 블록버스터 대신에 다른 나라 영화들로 관람이 분산됐고, 한국영화로 관심이 옮겨갔다.

<마린보이>는 인물들의 피부색을 염두에 두지 않고 또 그들이 영어만 쓴다면,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B급 블록버스터라고 믿어도 좋을 만큼 화면적으로도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했고 헐리웃 상업영화에 길들여진 한국 관객의 눈높이를 배려한 듯 쓰여진 시나리오의 내러티브도 무난한 편이었다. 외형적 아름다움 대비 연기의 흡입력이 다소 떨어지는 박시연을 제외하면 배우들의 연기도 칭찬할만 했다. 그런데도 2% 부족한 것이 아니라 엉성하고 불편했다.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그것이 시나리오상의 문제인지 편집상의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내용적으로나 관객의 관람욕구적 측면에서나 디테일이 필요한 씬마다 중요한 장면들이 빠져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건 전개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멜로라인에 있어 김강우와 박시연의 관계가(배우들의 연기가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가) 전혀 납득스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긴장감을 유지해가는 가장 중요한 축은 조재현-박시연-김강우가 형성하는 관계의 긴장감과 더불어 바다에서 목숨을 걸고 마약을 운반하는 마린보이라는 직업(?)적 특성에서 오는 긴장감이다. 그런데 영화 <마린보이>에는 시종일관 바다가 등장하고 잠수복을 입은 김강우가 그 안을 유영하는 씬은 등장하지만, 그 안에서 유영하는 김강우를 위협하는 바다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린보이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바다 밖의 사람들이다.

물론 이것은 영화 속의 현실이기도 하고,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 속의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영화가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바다에서 목숨을 걸고 일(?)을 하는 ‘마린보이’에 대한 이야기고 영화 속에서도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섥힌 인연으로 만나는 이유 자체가 ‘마린보이’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마린보이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그것을 기대하고 오는 관객에 대한 배신인 동시에 자기배반이다. 그런데 영화 <마린보이>에서는 전직 수영선수였던 이를 거액의 채무까지 탕감해주기로 하면서 마린보이로 데려와 바다와 친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수시로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입으로 떠들 뿐, 김강우가 바다에 마린보이로 몸을 던지는 두번의 상황에서 모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시나리오를 쓰고 쓰고 또 쓰다 지친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이 잘 떠오르지 않고 모르겠는 부분을 슬쩍 생략하고 지나간 것처럼 보일 정도다.

가장 큰 문제는 김강우와 박시연의 관계 설정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로만 나열해 보자면 김강우는 박시연이 예뻐서 훔쳐보고, 거절 못하고, 은근슬쩍 찝쩍인다. 그러다가 뜬금 맞게 로비에서 키스씬을 벌이더니 그것이 바로 베드씬으로 이어지고, 이후 그들은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사랑을 본격화하는데 나중에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거는데 까지는 1달이 채 걸리지 않는다. 박시연이 조재현에게 냉랭한 이유는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이유는 생략) 하지만 아무나랑이나 자고, 웬만한 남자라면 마다하지 못할 미모의 소유자인 그녀가 갑자기 오랜 시간 해온 다짐이나 상황을 망쳐가면서까지 김강우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린보이>의 이런 납득되지 않는 사랑의 시작과 전개와 절정은 인물들의 캐릭터로부터 많이 기인하는데, <마린보이>의 김강우나 박시연은 헐리웃 영화 <미션임파서블>이나 각종<007> 시리즈와도 닮아 보이고 한국영화 <타짜>와도 흡사하다. 사실 영화 <타짜>이후 정마담의 외형적 모습이나 말투, 성격은 이후 <무방비도시>의 손예진을 비롯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왔다. 한번도 원안인 <타짜>의 김혜수를 뛰어넘거나 미치는 매력적인 팜므파탈은 보여지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문제는 헐리웃 영화처럼 그저 그러려니 싶어지지도 않고(헐리웃 영화에서도 이렇게 첫눈에 반해 단시간에 서로에게 목숨을 걸게되는 상황을 그려낼 때는 매우 납득 가능하도록 상황을 만들거나 인물의 캐릭터를 부여하는데 공을 들인다) <타짜>의 고니와 정마담처럼 표현의 가벼움 속에서 느껴지는 각자 내면에 자리한 열정이나 애증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마린보이> 초반부에 등장한 그들의 화끈한 정사씬은 그 시점에 그들이 반드시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야 하는 순서 배치처럼 보여서 어색했고, 이후 그들이 서로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과정은 김빠진 맥주처럼 밍숭밍숭했다.

결론적으로 전개과정의 동력이 되는 남녀주인공의 사랑은, 그들은 사랑을 할지 몰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그들이 납득시키고자 하는 온도보다 훨씬 낮으니 지루했고, 당연히 보여질거라 생각했던 바다에서의 장면이나 과정이 생략된 액션은 심심했다. 굳이나 헐리웃 영화를 따라하고 싶었다면 헐리웃 블록버스터가 제1순위로 여기는 상상 이상의 ‘볼거리’에 주안점을 두던가, 한국영화의 장점인 인물간의 감정선에 중점을 둘 거라면 조재현-박시연-김강우의 관계가 보다 치열하고 안타깝게 그려질 수 있도록 그저 배경으로만 등장하는 바다를 쓸데없이 자주 등장시켜 관심을 분산시키는 <마린보이>같은 설정을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헐리우드 영화 삘을 열심히 냈지만 그로인해 헐리우드 영화가 주는 만족을 기대하게 해 놓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대신 어정쩡한 멜로극을 그려버린 <마린보이>는, 최악은 아니었지만 그럴듯하게 만들어졌으나 맛은 없는 B급 케잌 같았다. 욕심을 너무 많은 내다보면 때론 욕심을 내지 아니한만 못할 때가 많은데, 소재나 흥미롭거나 캐스팅이 화려해 소문이 무성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맞닥드리는 우(愚)다. 소재 면에서 참신했던 <거울 속으로>가 그러했듯, <마린보이>는 미국으로 리메이크 판권을 팔 가능성은 있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혀 다른 각색을 거칠 것으로 보여지며, 국내에서 과속스캔들을 잇는 흥행몰이를 하기에도 역부족으로 보인다. 그냥, 한국영화의 장점인 인물간의 관계와 감성선을 그리는데 치중하든가 헐리웃 영화처럼 아예 볼거리를 화려하게 펼쳐놓는 방향으로 갔으면 한결 좋았을 뻔 했다. 킬링 타임하기에 나쁘지 않은 이 영화가, 그러나 미국도 한국도 아닌, 태평양 중간 쯤 멈춰선 듯 어정쩡했다. 꼭, 오늘날 한국 영화들이 부딪힌 한계처럼, 한국 사회가 서있는 좌표처럼.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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