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릴 때 읽던 동화에서부터 문학상 수상작에 이르기까지 사랑은 늘 중심에 있다. 인생에서 사랑이 가장 실존적인 욕망이기 때문일까? 그렇게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그리고, 사랑을 담아내기에 여념이 없다.
키친은 그런 사랑에 관한 또 하나의 이야기이다. 많은 멜로 영화들이 그렇듯이 홍지영의 키친 역시 사랑의 이야기를 풍부한 감성으로 담아내었다. “사랑은 아름다운거야”라고 외치듯이 그녀의 작품 속에는 온통 새콤달콤한 사랑이 넘쳐난다. 그 달콤한 잔향은 스크린을 뚫고 나와 관객들의 가슴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너무 현실적이지 않은 비약된 이야기라고 비평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옷깃에 스며든 그 잔향을 온전히 털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만큼 상큼한 영상과 톡톡 튀는 대사로 관객과 소통하려 했던 감독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싶다.
그러나 그런 가벼운 이야기만으로 작품에 대한 호/불호를 평가하기엔 뭔가 부족할 만큼 다소 진지한 면도 엿보인다. 그건 이 영화를 통해서 관객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싶어 했던 감독의 어떤 의도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과 더불어 상인의 집 키친과 모래의 양산 가게를 오가며 느껴지는 상큼한 영상의 아름다움에 유혹되던 관객들은 모래와 두레의 아찔한 만남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의 본격적인 전개에 당황하면서 감독이 던지는 진지한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상당부분 관객이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감독이 영화를 통해 어느 정도는 힌트를 주고 있지만 여전히 그 답이 완전히 제시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관객들은 영화의 플롯이나 전개가 엉성하다고 평가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감독이 그 답을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만큼 관객들은 그 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감독의 치밀함이 정말로 여기까지에 이르렀다면 이 영화는 또 다른 평가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사랑은 실존적인가? 본질적인가?
홍감독의 첫 질문은 매우 철학적이다. 그녀는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런 학문적 배경 때문일까? 첫 질문부터 철학적 물음을 뽑아 들었다. “사랑은 실존적인가? 본질적인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모레는 상인이 건네 준 팸플릿을 들고 도자기 전시장에 갔다가 휴관일인 것을 확인하고 몰래 전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프랑스에서 한국에 오자마자 그 전시장에 역시 몰래 들어온 두레와 우연히 마주친다. 그리고 그곳에서 둘은 사랑을 나눈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눈부신 햇빛을 피하려다 저항할 수 없는 유혹에 이끌려 사랑을 나누는 모래와 두레! 그들의 행위는 마치 태양 빛이 강렬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뫼르소(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를 연상케 한다. 철학적 배경을 갖고 있던 홍감독의 의도가 엿보이는 플롯이다. 암튼 이 둘의 우연한 만남과 행위 속에서 감독은 사랑의 가치는 실존성 속에 있는지 본질성 속에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철학의 핵심 주제인 존재론에 있어서 실존과 본질의 논쟁은 그 역사가 깊다. 그 논쟁은 중세의 실념론과 유명론 논쟁에서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실존주의적 대반전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세계에서 치열하게 공방을 벌여왔다. 그 결과 20세기 들어서는 2천년 이상 존재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본질적 가치보다 실존적 가치가 훨씬 더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존재성을 포함해 여타의 존재성 여부가 이데아적 본질보다는 삶의 자리인 현재적 실존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철학적 대세의 흐름 속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랑의 존재론을 질문 받게 된다. 여기서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평소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우연한 사랑과 그로 인한 일탈을 꿈꿔왔던 관객들은 모래의 일방적인 사랑에의 이끌림에 당황하게 된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줄곧 함께 해 온 남편 상인을 너무도 사랑한다. 그녀의 결혼 생활을 행복 그 자체였다. 그녀의 현실적인 사랑은 충분히 이데아적이고 흠잡을 데 없다. 만족할만한 결혼생활, 행복한 일상, 사랑에 있어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삶. 그녀에게 사랑은 삶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그녀가 사랑인지 뭔지도 모르는 한 순간의 유혹에 자기를 던진다. 그리고는 그 특별한 맛에 빠져버리고 만다. 사랑이 있는 자리에서 다른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모래의 행동은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저들의 고민은 사실 실존과 본질 사이에서 존재론적 고민을 하고 있는 철학자들의 고민이다. 사랑은 실존적인 것인가? 본질적인 것인가? 실존과 본질 사이의 방황 모래와 상인의 관계 속에서 우린 사랑의 본질성을 발견하게 된다. 당연히 그렇게 있어야 하고 늘 그렇게 존재하는 사랑. 느끼기에 전혀 어색하지도 않고, 설레지도 않으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관계를 붙들어 주는 중력과도 같은 사랑. 사랑은 두 사람의 관계를 붙들어 주는 본질적인 힘이다. 그 안에 있으면 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펀드 매니저로 승승장구 하던 상인이 잘 나가던 직업을 그만 두고 요리사가 되어 식당을 개업하겠다고 해도 전혀 문제 삼지 않을 만큼 본질적인 사랑은 늘 안정되고 편안하다. 모래 역시 침대에서 남편에게 우연한 만남에 우발적인 관계를 맺게 된 사실을 이야기할 만큼 본질적인 사랑은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로 이끌린다. 이런 본질성 때문에 모래와 상인의 관계는 남녀 간의 애로스적 관계를 넘어서 남매간의 우정(필로에), 혹은 부모나 신의 사랑(로고스)을 드러내기도 한다. 음식으로 말하면 가장 좋아하는 음식처럼 늘 식욕을 돋우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전통적인 메뉴와 같을 것이다. 반면에 모래와 두레의 관계는 매우 실존적이다. 그 관계 속엔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충동적인 이끌림이 있고, 거역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힘이 있다. 이성으로는 할 수 없지만 의지로는 가능한 그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늘 조마조마하고 위태로우며, 그럴수록 더 강력한 욕망으로 되살아나는 그런 사랑이 바로 실존적인 사랑이다. 강렬한 햇빛을 보면 저항할 수 없어 눈을 감고야 마는 것처럼, 모래의 이성을 눈감게 하는 강렬한 사랑이 바로 두레와의 실존적 사랑이다. 이들의 사랑은 마치 퓨전 음식과도 같다. 만일에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주 이상한 음식이 되고 말 그런 음식 말이다. 서로 궁합을 맞출 수 없는 두 사람이 더 강력한 어떤 소스에 의해 결국엔 환상적인 조합을 이뤄내는 퓨전 음식과도 같이 모래와 두레의 사랑은 그렇게 환상적이다 못해 몽환적이다. 모래는 이 두 사랑 사이에서 방황한다. 어느 하나를 선뜻 결정하기 힘들어하는 모래의 모습은 실존과 본질을 사이에 두고 존재론적 물음에 갈등하는 해석학자들 같다. 자기의 분명한 철학적 견해를 확립하지 못한 새내기 철학자들처럼 모래는 그 두 사랑 모두를 품고 싶어 한다. 그것이 가능할까? 이 지점에서 감독은 관객들에게 두 번째 물음을 던진다. 이 두 사랑을 모두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고? 물론 이 질문에 무 자르듯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점은 홍감독 또한 마찬가지이다. 철저하게 윤리적으로 답한다면 당연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이미 선택된 사랑을 두고 또 다른 사랑을 품는 건 불륜이다. 그런 생각조차도 용납될 수 없는 게 윤리적 판단이다. 이런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진 이유는 원죄로 인해 허물어진 사회를 바로잡고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 자체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이 점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그런 윤리적 기준은 많이 무너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래가 욕망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욕망의 한 복판에서 우리를 늘 괴롭힌다. 특별히 한 여자의 두 남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패미니즘적 도전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여성 감독으로서 영화에 이만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 성숙되어 있다. 그래서 모래의 욕망은 충분히 사회적 담론의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그 담론에 대한 답 또한 어느 정도 예견된다. 감독은 그 상투적인 답을 상인의 행동을 통해서 보여 준다. 사랑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 모래와 사랑하는 동생 두레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된 상인은 결국 배신감에 대한 분노 때문에 한 바탕 소동을 치룬다. 그리고 모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를 강요한다. 여기서 사랑은 본질과 실존으로 나눠질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모래에게 있어서 상인과 두레 모두를 향한 사랑은 다 소중하다. 그 둘 다 모래에게는 소중한 의미가 있다. 사랑의 가치가 본질적인 것에도 있고 실존적인 것에도 있다. 그 둘의 관계 중 어느 하나를 말하게 되면 그건 존재론적으로 완전한 사랑이 되지 못한다. 존재론에 있어서 실존과 본질의 논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건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이원적인 것이다. 모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그 공간에 사랑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이로써 감독은 한 공간(키친)에서의 두 사랑의 결말을 그려낸다. 실존과 본질이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모래의 두 사랑은 현실 세계에서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그곳에 더 이상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래의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 인해 두레는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고, 상인은 모래와 이혼을 하게 된다. 이렇듯 키친이라는 한 공간에서 두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궁극적 물음에 집요하게 매달리던 감독의 질문은 결국 현실적인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영화는 이 현실 속에서 매우 소중한 교훈 하나를 관객들에게 건네 준다. 그건 바로 “사랑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매우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한 아포리즘이다. 사랑은 실존적이면서 본질적인 가치로 존재한다. 이 이원적 가치 속에 사랑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두 가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사랑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와 존재”에서 말한 것처럼 진정한 가치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모래의 사랑은 소유 양식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존재양식에 의거한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존재양식에 따른 사랑이어야 한다는 걸 홍지영 감독은 말하고 싶어하는 거 같다. 사랑은 요리할 수 없다. 이 영화 속에서 오기가미 나오코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슬로라이프 영화를 지향하면서 맛깔스런 음식으로 영화를 한 가득 채우는 그의 영화처럼 홍지영 역시 감칠맛 나는 요리의 세계로 영화를 장식한다. 그러나 그건 내용상의 미장센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키친이라는 공간 속에서 사랑의 공존성을 논하고자 했던 것처럼 요리를 통해서 사랑의 또 다른 본질을 얘기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즉 ‘사랑도 요리가 될까?’를 모색하고자 하는. 요리는 감식가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결정되기 때문에 주관적 작품이지만 객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객관적인 평가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심오한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이성과 감성 속에서의 부단한 정신적 작용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따라서 사랑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모든 정신적 작용을 이해해야만 하는 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사랑은 그야말로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에 속하는 정신적 요소의 결과이다. 따라서 사랑은 키친에서 요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신이나 이데아처럼 초월적 정신이다. 그 초월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만 사랑은 존재한다. 모래의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녀의 대사에서 은연중에 플라토닉 러브란 말이 등장한다. 인간의 사랑은 이데아의 반영이므로 본질적인 사랑은 결국 변할 수 없는 완전한 이데아적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런 사랑이 가능한 세상이 있을까? 홍지영 감독의 아름다운 영상의 세계 속에도 그런 사랑은 없는 것 같다. 그럼 그런 사랑은 정말로 없다는 말인가? 우리 세상의 사랑은 모두 잘 요리된 음식과 같은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한 관객으로서 감독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홍감독의 첫 질문은 매우 철학적이다. 그녀는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런 학문적 배경 때문일까? 첫 질문부터 철학적 물음을 뽑아 들었다. “사랑은 실존적인가? 본질적인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모레는 상인이 건네 준 팸플릿을 들고 도자기 전시장에 갔다가 휴관일인 것을 확인하고 몰래 전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프랑스에서 한국에 오자마자 그 전시장에 역시 몰래 들어온 두레와 우연히 마주친다. 그리고 그곳에서 둘은 사랑을 나눈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눈부신 햇빛을 피하려다 저항할 수 없는 유혹에 이끌려 사랑을 나누는 모래와 두레! 그들의 행위는 마치 태양 빛이 강렬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뫼르소(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를 연상케 한다. 철학적 배경을 갖고 있던 홍감독의 의도가 엿보이는 플롯이다. 암튼 이 둘의 우연한 만남과 행위 속에서 감독은 사랑의 가치는 실존성 속에 있는지 본질성 속에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철학의 핵심 주제인 존재론에 있어서 실존과 본질의 논쟁은 그 역사가 깊다. 그 논쟁은 중세의 실념론과 유명론 논쟁에서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실존주의적 대반전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세계에서 치열하게 공방을 벌여왔다. 그 결과 20세기 들어서는 2천년 이상 존재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본질적 가치보다 실존적 가치가 훨씬 더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존재성을 포함해 여타의 존재성 여부가 이데아적 본질보다는 삶의 자리인 현재적 실존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철학적 대세의 흐름 속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랑의 존재론을 질문 받게 된다. 여기서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평소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우연한 사랑과 그로 인한 일탈을 꿈꿔왔던 관객들은 모래의 일방적인 사랑에의 이끌림에 당황하게 된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줄곧 함께 해 온 남편 상인을 너무도 사랑한다. 그녀의 결혼 생활을 행복 그 자체였다. 그녀의 현실적인 사랑은 충분히 이데아적이고 흠잡을 데 없다. 만족할만한 결혼생활, 행복한 일상, 사랑에 있어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삶. 그녀에게 사랑은 삶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그녀가 사랑인지 뭔지도 모르는 한 순간의 유혹에 자기를 던진다. 그리고는 그 특별한 맛에 빠져버리고 만다. 사랑이 있는 자리에서 다른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모래의 행동은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저들의 고민은 사실 실존과 본질 사이에서 존재론적 고민을 하고 있는 철학자들의 고민이다. 사랑은 실존적인 것인가? 본질적인 것인가? 실존과 본질 사이의 방황 모래와 상인의 관계 속에서 우린 사랑의 본질성을 발견하게 된다. 당연히 그렇게 있어야 하고 늘 그렇게 존재하는 사랑. 느끼기에 전혀 어색하지도 않고, 설레지도 않으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관계를 붙들어 주는 중력과도 같은 사랑. 사랑은 두 사람의 관계를 붙들어 주는 본질적인 힘이다. 그 안에 있으면 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펀드 매니저로 승승장구 하던 상인이 잘 나가던 직업을 그만 두고 요리사가 되어 식당을 개업하겠다고 해도 전혀 문제 삼지 않을 만큼 본질적인 사랑은 늘 안정되고 편안하다. 모래 역시 침대에서 남편에게 우연한 만남에 우발적인 관계를 맺게 된 사실을 이야기할 만큼 본질적인 사랑은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로 이끌린다. 이런 본질성 때문에 모래와 상인의 관계는 남녀 간의 애로스적 관계를 넘어서 남매간의 우정(필로에), 혹은 부모나 신의 사랑(로고스)을 드러내기도 한다. 음식으로 말하면 가장 좋아하는 음식처럼 늘 식욕을 돋우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전통적인 메뉴와 같을 것이다. 반면에 모래와 두레의 관계는 매우 실존적이다. 그 관계 속엔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충동적인 이끌림이 있고, 거역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힘이 있다. 이성으로는 할 수 없지만 의지로는 가능한 그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늘 조마조마하고 위태로우며, 그럴수록 더 강력한 욕망으로 되살아나는 그런 사랑이 바로 실존적인 사랑이다. 강렬한 햇빛을 보면 저항할 수 없어 눈을 감고야 마는 것처럼, 모래의 이성을 눈감게 하는 강렬한 사랑이 바로 두레와의 실존적 사랑이다. 이들의 사랑은 마치 퓨전 음식과도 같다. 만일에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주 이상한 음식이 되고 말 그런 음식 말이다. 서로 궁합을 맞출 수 없는 두 사람이 더 강력한 어떤 소스에 의해 결국엔 환상적인 조합을 이뤄내는 퓨전 음식과도 같이 모래와 두레의 사랑은 그렇게 환상적이다 못해 몽환적이다. 모래는 이 두 사랑 사이에서 방황한다. 어느 하나를 선뜻 결정하기 힘들어하는 모래의 모습은 실존과 본질을 사이에 두고 존재론적 물음에 갈등하는 해석학자들 같다. 자기의 분명한 철학적 견해를 확립하지 못한 새내기 철학자들처럼 모래는 그 두 사랑 모두를 품고 싶어 한다. 그것이 가능할까? 이 지점에서 감독은 관객들에게 두 번째 물음을 던진다. 이 두 사랑을 모두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고? 물론 이 질문에 무 자르듯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점은 홍감독 또한 마찬가지이다. 철저하게 윤리적으로 답한다면 당연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이미 선택된 사랑을 두고 또 다른 사랑을 품는 건 불륜이다. 그런 생각조차도 용납될 수 없는 게 윤리적 판단이다. 이런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진 이유는 원죄로 인해 허물어진 사회를 바로잡고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 자체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이 점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그런 윤리적 기준은 많이 무너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래가 욕망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욕망의 한 복판에서 우리를 늘 괴롭힌다. 특별히 한 여자의 두 남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패미니즘적 도전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여성 감독으로서 영화에 이만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 성숙되어 있다. 그래서 모래의 욕망은 충분히 사회적 담론의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그 담론에 대한 답 또한 어느 정도 예견된다. 감독은 그 상투적인 답을 상인의 행동을 통해서 보여 준다. 사랑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 모래와 사랑하는 동생 두레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된 상인은 결국 배신감에 대한 분노 때문에 한 바탕 소동을 치룬다. 그리고 모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를 강요한다. 여기서 사랑은 본질과 실존으로 나눠질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모래에게 있어서 상인과 두레 모두를 향한 사랑은 다 소중하다. 그 둘 다 모래에게는 소중한 의미가 있다. 사랑의 가치가 본질적인 것에도 있고 실존적인 것에도 있다. 그 둘의 관계 중 어느 하나를 말하게 되면 그건 존재론적으로 완전한 사랑이 되지 못한다. 존재론에 있어서 실존과 본질의 논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건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이원적인 것이다. 모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그 공간에 사랑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이로써 감독은 한 공간(키친)에서의 두 사랑의 결말을 그려낸다. 실존과 본질이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모래의 두 사랑은 현실 세계에서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그곳에 더 이상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래의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 인해 두레는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고, 상인은 모래와 이혼을 하게 된다. 이렇듯 키친이라는 한 공간에서 두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궁극적 물음에 집요하게 매달리던 감독의 질문은 결국 현실적인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영화는 이 현실 속에서 매우 소중한 교훈 하나를 관객들에게 건네 준다. 그건 바로 “사랑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매우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한 아포리즘이다. 사랑은 실존적이면서 본질적인 가치로 존재한다. 이 이원적 가치 속에 사랑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두 가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사랑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와 존재”에서 말한 것처럼 진정한 가치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모래의 사랑은 소유 양식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존재양식에 의거한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존재양식에 따른 사랑이어야 한다는 걸 홍지영 감독은 말하고 싶어하는 거 같다. 사랑은 요리할 수 없다. 이 영화 속에서 오기가미 나오코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슬로라이프 영화를 지향하면서 맛깔스런 음식으로 영화를 한 가득 채우는 그의 영화처럼 홍지영 역시 감칠맛 나는 요리의 세계로 영화를 장식한다. 그러나 그건 내용상의 미장센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키친이라는 공간 속에서 사랑의 공존성을 논하고자 했던 것처럼 요리를 통해서 사랑의 또 다른 본질을 얘기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즉 ‘사랑도 요리가 될까?’를 모색하고자 하는. 요리는 감식가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결정되기 때문에 주관적 작품이지만 객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객관적인 평가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심오한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이성과 감성 속에서의 부단한 정신적 작용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따라서 사랑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모든 정신적 작용을 이해해야만 하는 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사랑은 그야말로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에 속하는 정신적 요소의 결과이다. 따라서 사랑은 키친에서 요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신이나 이데아처럼 초월적 정신이다. 그 초월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만 사랑은 존재한다. 모래의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녀의 대사에서 은연중에 플라토닉 러브란 말이 등장한다. 인간의 사랑은 이데아의 반영이므로 본질적인 사랑은 결국 변할 수 없는 완전한 이데아적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런 사랑이 가능한 세상이 있을까? 홍지영 감독의 아름다운 영상의 세계 속에도 그런 사랑은 없는 것 같다. 그럼 그런 사랑은 정말로 없다는 말인가? 우리 세상의 사랑은 모두 잘 요리된 음식과 같은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한 관객으로서 감독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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