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레슬러.
미키 루크 주연 ‘더 레슬러’
‘구제불능’ 미키, 주인공 랜디와 한 몸인 듯
왕년 레슬링 황제의 말년 애잔하게 잡아내
‘구제불능’ 미키, 주인공 랜디와 한 몸인 듯
왕년 레슬링 황제의 말년 애잔하게 잡아내
빼어난 무용수는 무대에 서 있기만 해도 춤이 된다지만, 영화 <더 레슬러>의 미키 루크는 앉아 있기만 해도 연기가 되는 듯하다. 지친 수사자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무도 없는 라커룸에 앉은 왕년의 레슬링 황제, 랜디. 1980년대 최고 스타에서 권투 선수로의 변신, 잇따른 부상과 성형 수술에 따른 얼굴 변형, 그리고 다시 은막으로 돌아온 미키 루크. 랜디의 영광스러웠던 과거와 불행하기 이를 데 없는 오늘은 미키 루크의 그것과 정확히 오버랩되면서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 미국판 네오리얼리즘의 탄생 <천년을 흐르는 사랑> <레퀴엠> 등에서 감각적이며 실험적 영상을 추구해 온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은퇴 레슬러의 피폐한 일상을 다룬 <더 레슬러>에서 기존 스타일을 깨끗이 버렸다. 대신 최근까지 다큐멘터리를 찍어 온 미국의 존경받는 촬영기사 매리스 앨버티를 선택했다. 그는 16㎜ 카메라를 손에 들고 랜디의 불안한 일상을 기록하듯 담아낸다. 카메라는 걸어다닐 때도 끊임없이 신음 소리를 토해내는 랜디의 뒷모습을 잡아내는 데 최적의 수단이었다.
혹독한 운동으로 15㎏의 근육을 만들어낸 미키 루크는 실제 레슬링 선수와의 아슬아슬한 격투를 대역 없이 해냈다. 미국 평단은 “미국판 네오리얼리즘의 탄생”이라고 격찬하고 있다.
■ 두 개의 슬픈 등짝…밑바닥 인생들 한국 영화 <우아한 세계>(감독 한재림)가 조폭 세계의 누추한 실상을 과장하지 않고 보여주듯 <더 레슬러>는 화려한 링 뒤에 숨겨진 레슬링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링에 오르기 전 선수들은 미리 작전을 짜고 각종 비밀 병기를 준비한다. 면도칼과 철조망, 사다리, 스테이플러 총 등등.
경기를 마친 랜디는 등에 박힌 스테이플러를 떼어내고, 슬픈 등을 가진 스트립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를 찾아간다. 안경과 보청기에 의지한 퇴물 레슬러 랜디와 손님들로부터 퇴짜 맞기 일쑤인 퇴물 댄서 캐시디는 서로 본능적으로 끌리지만, 각자의 과거처럼 둘의 관계는 꼬여만 간다. ‘더블 잡’을 뛰어도 컨테이너 박스 집세조차 내기 어려운 랜디의 삶은 미국 밑바닥 인생들의 삶을 아프게 은유한다.
■ 미키 루크의 몰락과 부활 미키 루크는 1981년 <보디 히트>를 시작으로 <나인 하프 위크> <와일드 오키드>를 거치며 세계적인 섹스 심벌로 떠올랐다. 그러나 앨런 파커 감독이 “미키와 일하는 건 악몽”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숱한 상처를 주고, 1991년 어릴 적 터전이었던 복싱계로 돌아갔다. 그는 <언터처블> <양들의 침묵> <레인맨> <플래툰> <펄프 픽션> 등의 역사적 배역들을 거절했다. 대신 아내에 대한 폭행과 음주 운전으로 경찰에 체포되면서 ‘구제불능’ 딱지가 붙었다. 8전 6승 2무 4케이오의 성적을 거뒀지만, 코와 발가락, 갈비뼈가 부러지고, 혀가 찢어지고,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입은 채 1995년 선수 생활을 그만둔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신 시티>(2005)로 주류 할리우드에 다시 입성하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 그리고 랜디의 마지막 멘트 <더 레슬러>의 마지막 경기에서 랜디는 마이크를 잡고 관객들에게 유언 같은 인사를 남긴다. “다들 내가 링에 못 오를 줄 알았지만 이렇게 왔습니다. 솔직히 젊었을 때 막살다 보니 남은 건 고통스런 현실뿐이고 결국 사랑하는 사람까지 다 떠났죠. 이제 귀도 어둡고 기억력도 가물가물, 예전만큼 섹시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나 랜디 램, 살아 있습니다! …(중략)… 저는 절대 링을 떠날 수 없어요. 여러분이 있으니까요! 바로 이 함성소리가 내 심장의 피가 되어 날 다시 뛰게 합니다!” 여기서 ‘링’을 ‘스크린’으로 바꾸면, 미키 루크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3월5일 개봉.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유레카 픽쳐스 제공
더 레슬러.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유레카 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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