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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블로그] 아버지와 워낭소리

등록 2009-03-19 13:50

사람은 원래, 누군가가 그어놓은 선을 허물고 다른 세계를 넘나들고 싶도록 만들어진 모험과 호기심의 존재이다. 항상 영화관을 들어설 때면 바깥세상과 경계가 선명한 작은 우주공간에 발을 들여놓는 느낌이다.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 영화를 선택하게 되는 몇 가지 요인. 우선, 포스트가 주는 이미지를 한꺼번에 읽는다. 한번 스쳐봤을 때 마음에 우수 리스트로 당긴다면 그 다음 감독을 보고 어떤 지향점을 가진 영화인지 보게 된다. 세월을 거쳐 검증된 영화들을 보면 그 필름의 원본들은 소멸되어도 포스트가 주는 강열함은 아주 질긴 것 같다. ‘원서어폰어 타임 아메리카’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은 포스트를 보면 몇 번이고 또 보고 싶게끔 만들었다.

포스트는 영화 전반에 대한 강한 농축의 느낌을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화들이 가지는 태도는 매우 무성의 하다못해 때로 화가 난다. 탄탄한 스토리 구성에 신경 쓰기보다 점점 더 자극적인 소재로, 상업적인 냄새 풀풀 나는 개봉관에 혹시, 하고 갔다가 ‘역시나’하고 들인 시간과 돈을 아까워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워낭소리’는 소리 없는 흥행 대열에 합류하였다. 순수한 눈망울을 가진 늙은 소 한마리가 간만에 나를 영화관으로 이끌었다. 이 충렬 감독 본인의 아버지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감사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짧은 다큐멘터리. 관객동원 100만을 벌써 돌파했다는 소식이 있은 지 한참만에야 시간을 냈다.

‘워낭소리‘에는 그 흔한 나레이션도 없고 예쁘고 잘생긴 배우도 등장하지 않는다. 70분 내내 노인 부부와 늙은 소 한마리가 나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잘것없는 영화가 문명의 이기에 발 빠르게 편승해가는 우리를 열광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절묘한 감성의 터치가 아니었을까? 말 많은 세상에서 정작 소통이 단절되어버린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자연, 고향, 옛 것. 느림, 낡음, 노인.’ 사람들의 가슴 깊숙이 내제되어 있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을 오롯이 담아낸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 나는 시골에서 소를 보며 자랐다. 지금까지 ‘소’라는 존재는 우리 집과 우리 형제들에게는 필연적 관계다. 가난한 시골에서 소는 소중한 재산이며, 농사일을 전담하는 일꾼이며, 동시에 농부들의 오래된 동반자였다. 시험기간이라고 호사하는 요즘아이들은 이해 할 수 없겠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가 풀을 뜯는 동안 들판을 지키며 책을 보아야 했다. 영화 속의 할아버지가 그러하시듯, 농약이 닿지 않은 좋은 꼴을 베어다 쇠죽을 끓이는 일은 생전의 우리 아버지께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셨다.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 혼자서 시골의 외로움을 달래며 소와 함께 생활하신다. 오늘도 어머니는 녹록치 않은 삶에 대한 끊임없는 한탄과 지청구를 그 오래된 친구와 나누고 계실 런지도 모른다.

빛바랜 동화책 같은 어린 시절의 소와 아버지와 시골, 그리고 그 속에 내가 있었다. 관념 속에서 세상을 붕괴하고 영화 속에서 다시 세우는 순간이었다.

할아버지의 오래된 농사법처럼 자연의 시계에 순응하며 세상의 속도와 타협하지 않는 할아버지만의 우직한 삶의 방식. 인간과 말 못 하는 짐승과의 말없는 교감과 사랑!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8남매를 키워냈지만 정작 늙어 한 몸 어지 할 곳은 일생을 보낸 산골 움막집 한 칸이 전부 인 삶. 30년을 할아버지 삶의 관찰자이자 동반자인 늙은 소는 그렇게 할아버지 곁에서 생을 마감한다.

‘워낭소리’는 그들이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이자 ‘메타포’였고, 주인과 소통시키는 ‘매게 음’이었다. 그 워낭을 풀어주고, 고삐를 풀어주고, 멍에를 풀어주며 영혼을 자유로이 놓아 줄때 나는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 버렸다. 숭고한 의식처럼 살아간 우리네 할아버지, 아버지를 보았다. 오늘이 열두 해 째 맞이하는 아버님 기고라서 산소에 다녀왔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더욱 그립다. 세월이 갈수록 그 빈자리와 그리움은 커져만 가고 주체할 수 없는 회한과 설움에 가슴이 복받쳐 오른다.

우리네 아버지들의 삶처럼, 노인과 소의 삶처럼 결코 화려하지 않은 영화! 넘치는 것만이 좋은 건 아니다. 부족함과 느림이야말로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저력이 아닐까? 너무나 소박하고, 그래서 사계절의 풍경을 녹여낸 영상이 수묵화처럼 그 자체로 아름다웠던 영화. 간만에 감성의 샘을 마음껏 자극하던 단편하나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교육컬럼니스트 문학박사 송 명 석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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