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Gran Torino)”를 봤어요. 사랑하고픈 우파 휴머니스트입니다. 더티 해리의 B급 철학이 종교적 숭고함으로 옷 입습니다. 중산층 백인들이 버리고 떠난 미국 도시 사회의 리얼리티를 실감나게 그려내고요. 흑인들, 남미인들, 그리고 동양인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그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미국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인종차별의 풍속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의 애마 그랜 토리노를 중국 십대아이 태호에게 물려주더군요. 그는 태호가 그랜 토리노를 운전하는 디트로이트 미시건 호수 드라이브웨이 빈 공간을 푸른 하늘로 채우고, 그가 작곡한 노래를 틀어주더군요. 그 장면에 마음 한 구석에서 “그레이트 클린트 이스트우드” 하는 거예요.
이 영화 때문에 더티 해리 시리즈에서 80년대 중반에 나온 “더티 해리2-이것이 법이다 (Magnum Force)”를 봤어요. 해리 형사가 옥상에서 오토바이를 몰아 강 쪽으로 추적자를 유인하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아, 이거, 본 거잖아.”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한 때는 소문으로만 듣던 영화라도 TV에 바람처럼 스쳐간다 해도 제목을 족집게처럼 집어냈었거든요. 이제 책을 읽고 나서 메모를 해두지 않으면 그 책의 내용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말이죠. 그 메모가 그릇된 해석이면 더 희망이 없죠. 치매현상(Memento)인지 모르겠어요.
저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젊은 총명한 신부(overeducated seminarian)에게 찾아가 고해성사하면서 더티 해리 시리즈를 마무리 짓듯 해야 하나 봐요. 그런데 워낙 허랑방탕하게 살아서 고해성사하기도 쑥스러우니 어쩌면 좋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웃의 아픔에 온 몸을 던져 응답하면서 B급 인생을 종교적으로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데 말이죠. 그가 영화에서처럼 제게 묻는 것 같아요. “네가 산다는 게 뭔지, 죽는다는 게 뭔지, 알아?”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명석하지 못해도 그처럼 삶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야, 우리 사는 세상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겠죠.
프로이드는 종교는 인간 마음 저편, 무의식의 공간에 놓인 욕구의 성취라고 했어요. 신의 존재는 바로 그 욕구의 열매이고 그 욕구에 대한 응답인 것이겠죠. 인간이 욕망하는 것이 신이라는 환상을 연출한 것이라는 거죠. 맑스는 병든 사회의 환경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병든 인간이 마약처럼 복용하는 게 신앙이라고 했어요. 프로이드나 맑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해서 종교를 해석한 것이죠.
저는 프로이드나 맑스와는 다른 종교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을 부정하고 싶어요. 그런데 종교가 그들이 비판하는 데로 길을 걷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들고 있어요. 사회가 병들고 그 병든 사회를 비판하면 좌빨이라고 몰아세우고, 그 사회현상에 무감각하게 대중의 의식에 마약을 주입하는 거예요.
저는 “그랜 토리노”에서 세속화된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서 연출되는 광경을 만났어요. 종교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존재하고, 그 욕망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죠. 사회가 병들어 있는데도, 아니, 자기 안에 그 병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데도 그 사회로부터 도피해서 자기 내면에 안주하고 이웃을 외면하고 살면서 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죠. 그런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기 욕망을 따라서 산 것도 아니고, 자기 이웃의 절박한 삶과 두려운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았어요.
프로이드나 맑스가 “그랜 토리노”를 본다면 뭐라 할까요? 그들은 종교성 자체를 합리적 사고를 포기한 망가진 성품으로 보기에 “그랜 토리노”의 논리와 감성이 별 볼일 없어 보일 거예요. 그들은 이 영화를 두고 리얼리티는 없고 환상만 있다거나, 사회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비판이 결여되었다고 하지 않을까요? 아마 B 급 지적 능력의 부르조아지 감상주의로 등급을 매길 거예요. 당연히 엄지손가락 두 개를 아래로 내려 평가할 거예요. Tow Thumbs Down.
그리고 “그랜 토리노”에 대한 저의 감동을 무지몽매한 값싼 쁘띠 부르조아지의 감수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죠? 흥, 상관없습니다. 전 이데올로기 편향을 혐오하거든요. 그건 리얼리티가 결여되어있기 때문이죠. 프로이드나 맑스 모두 리얼리티를 찾아 헤맸지만 그들도 환상과 이데올로기의 틀에 허우적댄 게 아닌가요? 리얼리스트는 스스로 리얼리티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도달했다고 하지 않죠. 다만 그 환상과 이데올로기의 벽을 무너뜨리려고 발버둥 치면서 사는 것이죠.
“그랜 토리노”에는 환상이 없어요. 그리고 이데올로기도 없어요. 백인이 버리고 떠난 도시, 그 도시의 어둠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그들의 구원을 향한 종교적 숭고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세속적 이해가 있고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것이 법이다”의 논리로 B 급 인생 내러티브를 시작하던 그가 힘없는 자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것으로 그 내러티브를 마무리 짓는 것을 보면서 제 마음에 숙연함이 찾아오더군요. 자칭 좌빨인 저도 그렇게 살 용기가 없거든요. 그에게 경애를 보냅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