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앨프리드 히치콕이 ‘서스펜스의 거장’이라는 평판에 갇히지 않았다면 어떤 영화들이 나왔을지 생각해본다. 그 자신도 가끔은 사람들의 이런 기대에 갑갑해했던 모양이고 경력 초반기에 그가 만들었던 영화들은 장르가 꽤 다양한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란 가장 잘하는 영역 안에 자신을 가두고 정착하기 마련이고 그 사람의 가장 훌륭한 업적도 바로 그 시기에 나온다. 앨프리드 히치콕이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떤 게 나왔을까 궁금해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사이코> <현기증> <이창>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같은 영화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히치콕의 경우 사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맹렬 영화 청년으로 활동중인 시드니 루멧에서 볼 수 있듯, 영화감독이란 정신이 온전하다면 8, 90세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이니까. 하지만 연예계의 경우 그 평균 수명은 오히려 더 짧은 편이다. 특히 액션 배우라는 사람들이 그렇다.
여러분이 성룡(청룽, 재키 챈)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날고 기는 액션 스타로 명성을 떨쳐왔는데, 벌써 나이가 쉰을 넘겼다. 액션 배우로서는 당연히 은퇴해야 마땅한 나이지만 그렇다고 하던 일을 관두기는 싫다. 다른 배우들처럼 젊었을 때부터 다양한 역들을 조금씩 해왔다면 나이 든 뒤에 전환이 쉽겠지만 성룡의 경우는 그것도 어렵다. 그는 경력 대부분을 ‘성룡 캐릭터’를 연기하며 살아왔다. 홍콩에서도 할리우드에서도 그는 그냥 성룡이었다. 나쁜 일은 아니다, 단지 그 캐릭터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게 문제다.
곧 개봉할 <신주쿠 사건>은 스스로 변화해서 살아남으려는 성룡의 노력이 드러나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무술도 하지 않고 심지어 그렇게 착한 인물도 아니다. 야쿠자 편에 서서 총과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죽인다. 80년대 홍콩 누아르에 나왔을 감상적인 터프 가이 역을 50대의 성룡이 하고 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이고 배우가 배우이다 보니 이런 이야기나 캐릭터도 약간은 ‘성룡화’되어 있다.
솔직히 성룡의 캐스팅과 영화의 성룡화가 완성도에 크게 기여했다는 말은 못하겠다. 그는 이런 역을 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고 그가 애크러배틱 액션으로 악당들을 해치우지 않는 내용은 괴상하다. 우리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친숙해진 이미지가 몰입을 방해한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영화 자체보다 필사적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한 번 놓친 기회를 다시 잡으려는 베테랑 액션 배우의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성룡은 운이 좋다. 그는 상당히 동안이고 이전과 같은 무시무시한 액션은 어렵다고 해도 여전히 건강하다. 왕년의 입지를 포기한다고 해도 그가 스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며 참여할 수 있는 영화들은 많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시간을 돌리는 건 쉽지 않다. 성룡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아니, 처음부터 시간 같은 건 돌려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듀나/영화평론가
※ 듀나의 저공비행 칼럼을 마칩니다. 오랜 시간 수고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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