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의 ‘뒷담화’
김혜리의 카페 뤼미에르 / 가족만큼 눈을 들여다보며 대화하는 일이 드문 상대가 있을까. 우리는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티브이를 보면서, 혹은 잡다한 일거리를 손에 쥔 채로 가족과 이야기한다. 정색하고 마주앉는 기회가 마땅치 않다 보니, 가족 사이에서 진심이 실린 말들은 우회로를 돌아 옆구리를 찌르는 식으로 교환된다. 개중 절박한 말들은 미루고 미뤄지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순간에야 엉뚱한 장소에서 발화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말의 숨바꼭질은 간혹 흥미로운 기술의 경지에 이르는데 일본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그 광경을 포착한다. 요절한 맏아들의 기일을 맞아 요코야마가(家) 식구들이 한데 모인다. 은퇴한 동네 의사인 아버지와 평생 살림을 해 온 어머니는, 제 가정을 꾸린 딸과 둘째 아들 내외, 손주들을 맞이한다. 이들의 모습은 특별히 삭막할 것도, 아름다울 것도 없다. 어머니는 밀렸던 잔소리를 하면서 거둬 먹이기 바쁘고, 무뚝뚝한 아버지는 자기 방으로 퇴각하기를 반복한다. 아직 죽은 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차남 료타는 연례 행사를 적당히 치르고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요코야마가의 커뮤니케이션을 보자. 첫째, 그들은 짝을 바꾸어가며 자리에 없는 식구를 논한다. 어머니는 딸에게 결혼 경력 있는 며느리에 대해 아쉬움을 내비치고 며느리에게는 딸의 부주의한 성격을 불평한다. 딸은 아버지한테 아들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종용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엄마한테 전화 자주 하라고 타이른다. 진실은 파편으로, 한 다리 건너 소통된다. 둘째, 짐짓 들으라고 하는, 들려도 못 들은 척하는 뒷말이 흘러넘친다. 아버지는 자기 방에 앉아 부엌의 말소리에 귀를 세운다. 아내와 딸 또한 그가 듣고 있음을 안다. 셋째, 둘러앉은 가족의 대화는 넌지시 건네지지만 매우 노골적인 말들의 향연이다. “아들이 모는 차 타고 시장 가는 게 꿈이었다”는 어머니는 과거시제로 말하지만 현재의 소망을 호소하고 있다. “아이 딸린 과부는 재혼이 힘들다”는 아버지의 일반론은 며느리에게 아프게 꽂힌다. 넷째, 그들의 대화는 노이즈(소음)투성이다. 대화는 생활의 작은 소동과 소음에 연신 침해된다.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회상하는 순간에도 손주들은 떠들고 아들은 딴청을 피운다. 툇마루와 마당이 딸린 방 많은 이층집의 구조는 <걸어도 걸어도>의 영화적 설계도이기도 하다. 이 집엔 도망갈 데가 많다. 북적대는 식구를 피해 아버지는 마당에서 잡초를 뽑는다. 열린 창과 툇마루로 새어 들어오는 풍경과 소음은 대화가 불편한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인물들이 고개를 돌릴 수 있는 핑계와 무의미한 한담거리를 제공한다. 욕실 밖 일본식 세면실은 모호해서 유용한 공간이다. 늙은 아내는 미닫이 문 밖에 서서 오래전 남편의 불륜을 목격한 추억을 언급하며 단호하게 덧붙인다. “수건은 펴서 널어주세요.” 아무리 봐도 <걸어도 걸어도>는 가족의 소통 단절을 한탄하는 영화가 아니다. 건너오는 말, 스며드는 소리로 현대 가족의 소통 양상을 파악한 영화다. 김혜리 <씨네21> 편집위원 vermeer@cine21.com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