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릭 에너미’의 황홀한 모순
김혜리의 카페 뤼미에르 /
마이클 만 감독의 <퍼블릭 에너미>는 모순덩어리다. 황홀한 모순덩어리다. 제목부터 그러하다. 1930년대 미국에서 ‘공공의 적 1호’로 불리는 은행강도 존 딜린저(조니 뎁)는 부패한 금융기관을 미워하는 대중의 환호를 산다. 체포 직후 몰려든 기자 앞에서 딜린저는 할리우드 신작 시사회에 온 스타처럼 포즈를 잡는다. <퍼블릭 에너미>라는 제목은 ‘퍼블릭 아이돌’로 바뀌어도 무방하다. 당시 미국은 아직 젊은 나라였다. 영화는 범죄자들에게서 영감을 빌었고, 실제 갱들은 영화 속 갱스터의 옷차림과 말투를 참조한 시절이었다. <퍼블릭 에너미>의 한 장면에서 갱은 술에 취해 제임스 캐그니(당대의 스타 배우) 흉내를 낸다. 존 딜린저는 (아마 그의 행적에서 영감을 얻은) 갱스터 영화 <맨해튼 멜로드라마>를 관람하며 본인이 사는 방식의 정당성을 재확인한다. 딜린저의 개인적 비극은 이 폐쇄회로에서 출발한다. 딜린저는 영화처럼 살고자 한다. 이미지에 해로운 납치범죄를 기피하고 인질로 잡은 숙녀에게 코트를 덮어준다. 이 코트는 경찰에게 단서가 된다. 스스로를 의적으로 여기는 그는 “은행 돈을 털 뿐, 손님의 돈은 손대지 않는다”고 뇌까리지만 어불성설이다. 언제나 미래만 바라본다고 단언하면서도 그에게 노후대책은 없다. 차츰 조직화되는 범죄세계의 거물들은 대중의 시선을 끄는 딜린저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잡을 올가미를 짠다.
딜린저는 애인 빌리(마리옹 코티야르)에게 “내가 지켜주겠다”는 말을 주문처럼 되뇐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연인이 처한 위험은 바로 그가 초래한 것이다. 딜린저의 사랑은 지독히 로맨틱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것은 운명적 사랑을 실천하는 자신의 모습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딜린저는 대담하게도 경찰청의 ‘딜린저 대책반’에 들어가 수사기록을 감상한다. 마치 자신에게 헌정된 박물관을 관람하는 표정으로. 캐스팅의 의문은 여기서 풀린다. 조니 뎁은 결코 터프가이나 마초에 어울리는 배우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현존 미국 배우 중 1930년대 할리우드 스타에 가장 가까운 특질과 재능을 지녔다. 뎁이 지닌 몽상가의 눈동자는, 도취의 힘으로 일생을 돌파한 딜린저에게 제격이다. 총격전으로 범벅된 이 영화가 고요하게 느껴지는 이유의 8할도 조니 뎁이다.
고전적 서사를 참신한 양식과 테크놀로지로 구현해 온 마이클 만 감독 역시 언제나 모순적 연출자였다. <퍼블릭 에너미>에서도 그는 극사실주의적 고증에 집착하지만 그 결과는 판타지적이다. 더욱 세밀하고 선명하게 이미지를 포착하는 디지털 촬영이 결국 복무하는 목표는 장르적 고전미다. 마이클 만은,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살았던 한 사내에 대한 경의를 그런 식으로 표한다. “살아온 방식 그대로 죽어. 질질 끌지 마!” 영화 속 영화에서 클라크 게이블이 내뱉는 대사는 존 딜린저에게도, 고집스런 감독에게도 썩 어울린다.
김혜리 <씨네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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